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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풍납토성 배경으로 뒤늦게 담아본 내 전신 사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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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인가?

2001년 2월 졸저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김영사)를 발간한 직후 일일 것이다. 

미디어오늘인지 기자협회보인지 아무튼 언론 관련 전문 매체에서 저 풍납토성 사태와 관련한 내 행적과 내 생각을 취재하고선 풍납토성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있으면 달라 했다. 그 기사에 녹여 써먹겠다는 생각이었다. 

한데 그렇게도 풍납토성에 미쳐 날뛴 나였지만, 그때까지 정작 내가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내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후에는 저런 현장마다 더러 일부러 내가 들어간 사진을 남기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이후 그런 사진을 요청한 데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니 그런 사진으로 써먹은 것이 없다.  

앞 첨부 사진은 2008년 5월 7일, 풍납토성 경당지구를 한신대박물관이 재발굴하고, 그에서 다시 44호 건물지를 다시 노출했을 적이다. 

이때다 싶어 옛날 기억도 나고 해서 냅다 나도 사진 한 장 이를 배경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 누군가한테 부탁해서 한 번 박아봤다. 

오늘날 풍납토성을 있게 한 양대 걸물로 선문대 이형구 선생과 나 김태식을 꼽아야 하는데, 저날 내 기억에 이형구 선생도 당연히 오셨으니 내 기억도 있어 일부러라도 선생을 배경으로 큼지막하니 박은 사진도 있는데 어딘가 외장하드에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 44호 건물지는 풍납토성 발굴 아이콘과도 같은 곳이며, 저를 토대로 삼은 복원안이라 해서 언론에 자주 써먹히고, 한성백제박물관에서도 전시가 이뤄지는 중이지만 솔까 아직 그 성격 오리무중이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가 없다. 사진 속 저것은 극히 앞대가리 일부만 노출됐을 뿐이다. 

혹자는 종묘 혹은 그에 비견하는 신전 건축물로 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단일 뿐이다. 

바닥은 숯을 깔았고 그것이 단단히 굳어 저 바닥에서 굴리면 시멘트처럼 쿵쿵 소리가 났다. 

 
그날 저 경당지구에서 열린 지도위원회?(요즘 학술자문회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행사를 저때는 그리 불렀을 것이다)가 열린 한 장면이다. 

조사단이 발굴성과라며 주요한 출토 유물을 내어놓고선 우리 이런 거 발굴했다 선전 홍보하는 자리다. 

저 조사는 본래 조사단이 한신대박물관이었으니, 재발굴도 이 기관에서 했다.

책임조사원이 지금은 서울대 국사학과로 냅다튀어 이제 오늘내일 짤릴 날만 기다리는 권오영 선생이었고, 조사단장은 저때는 누구인지 자신이 없지만, 1차 조사 때 단장은 이남규 선생이었다. 

이미 저 무렵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풍납토성 조사에 본격으로 달라들어 실상 전담을 할 때라(그 전에는 서울대박물관이며 한신대박물관이니 해서 대학박물관도 한 다리를 걸쳤다. 서울대 쪽 조사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 저 자리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람이 많이 보인다. 

퇴직한지 한참이라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최맹식 선생(저때 직책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었던가?)이 보이고, 이인숙 선생도 보인다. 

최맹식 선생은 기와 전공자답게 역시나 기와쪼가리를 만지작거린다. 

저땐 내가 염색을 따로 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까만머리가 많은 시절이었다. 지금은 완전 백발이지만 말이다. 

저때 분명 서울시 공무원 신영문도 있었는데 함께 담긴 사진이 있는데 어디가 있는지 모르겠다. 

한때 추억담으로, 또 저 풍납토성이 한국문화재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하므로 그 일단의 증언이라는 생각으로 새삼 끄집어 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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