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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박제상 향기 깃든 그 땅에 신라가 쌓은 우불산성, 우리는 무엇을 채굴할 것인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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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의뢰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타격 조사, 연못터 확인

 

 
경남 양산시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원장 배덕환)과 손잡고 이 고장 삼호동 산2-16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옛 산성인 우불산성에 대한 본격 고고학적 탐사를 실시한 결과 이 산성은 거금 1천600년 전쯤인 서기 5세기 중반 내지 후반 신라 왕국이 건설한 성채라는 흔적으로 다수 확보했다고 두 기관이 29일 밝혔다.

삼국시대, 특히 신라시대 저 무렵 지금의 양산은 매우 중요했으니, 왜가 한반도를 침탈하는 주요 경로이기도 했고, 그 유명한 박제상(김제상)이 그 지방관을 지낸 데가 바로 양산이라, 당시에는 삽량주歃良州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둠이 좋다. 

조사단이 잠정 제시한 저 만든 시점 5세기 중반 내지 후반이라면 신라시대로 보면 눌지마립간 이래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시대에 해당한다. 신라가 열라 팽창하던 시기이면서, 그런 까닭에 사방에서 견제받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걸 보면 배치 양상이 독특하다. 아 물론 내 기준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며, 신라 산성 전반으로 내 독특함은 확대해야 한다. 무엇이 특이한가? 왜 이 산성은 볕이 들지 아니하는 북쪽에다가 주된 문을 내고, 그쪽에다가 관련 중심시설들을 배치했는가? 조선시대 읍성 관념으로 본다면 공북문拱北門이다.

 
저 우불산성 자체가 박제상 시절에 쌓은 산성이라 보기는 힘들다.

박제상은 서기 419년에 왜국에 인질 미사흔을 구출하러 갔다가 비명횡사했거니와, 조사단 발표에 따르면 비록 현재까지라는 단서 조항이 붙기는 하지만 박제상 서거 직후 쌓은 셈이 된다. 

이렇게 보면 우불산성은 박제상 시대에는 꼭 존재했거나 쌓은 것은 아닐지라도, 왜 저 시점에 바로 박제상이 태수를 지낸 그 고장에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조사단은 무엇보다 이 산성이 신라 왕도 서울인 지금의 경주와 그리고 신라가 해양으로 오가는 관문이었을 지금의 부산을 잇는 교통 요충에 위치한 군사적 거점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런 중요성을 반영하듯 이 우불산성이 있는 데서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산천제사가 이루어졌다. 

그 구체적인 양상 확인을 위한 이번 정밀 발굴조사 결과 우불산성은 "포곡식 토석혼축 산성으로 5세기 중후반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총평을 조사단은 제출했다.

지난해 말 이래 진행한 시발굴 조사 중 정밀조사는 북문이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과 연못이 있을 곳을 예상한 곳을 합친 총 445㎡에 대해 실시됐다.

이것이 조사단에서 말한 처음 쌓은 성벽 흔적이라고. 이 무렵 신라산성 이렇게 비실비실하지 않은데???

 
특히 북문 터는 진흙과 깬돌을 경사지게 쌓아 축조한 신라 석축산성 초기 형태로 밝혀졌고, 이는 경남 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독특한 축성기법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고 조사단은 덧붙였다.

또 성 내부에서는 통일신라 시기 건물지 초석과 석렬, 수혈 유구를 확인함으로써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에도 중요하게 활용되었다는증거를 확보했다.

아울러 긴목항아리[장경호]를 필두로 하는 6세기 무렵 신라시대 토기 조각들을 필두로 무수한 기와 조각과 같은 유물은 당시 생활양식과 건축방식에 통찰력을 제시한다.

아울러 성곽 북쪽 내부에서는 좁은 네모꼴 돌로 쌓은 연못 흔적도 새롭게 확인함으로써 향후 용도와 구조에 대한 추가 해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연못 단면

조사단 표현으로는 집수지集水池인 연못은 성 북쪽 벽과 성내 북동쪽 평탄지 사이 낮은 지형에서 드러났으며 처음에 만들고 나서 어느 시점에 크게 손댄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조사단은 1차 집수지, 2차 집수지로 구분했다. 

규모를 보면 1차 연못이 길이 24m, 너비 12m, 깊이 1.3 ~ 2.8m이며, 호안석축은 완만한 경사(32 ~ 37°)로 만들었고, 다양한 크기 돌을 이용한 허튼층쌓기 방식을 채택했다. 

서·북·동쪽 호안 석축이 남은 가운데 남쪽은 2차 연못을 만들면서 파괴했다. 2차 연못은 길이 17m, 너비 8m, 깊이 70 ~ 80cm, 평면 말각 장방형이며, 1차 연못 내부를 준설한 다음 바닥석과 호안석축을 만들었고 바깥은 진흙다짐을 했다.

호안석축은 경사가 다소 급한 편(38 ~ 40°)이며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함께 사용했다고. 
 

시기별 출토 유물


이번 조사 성과를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양산에서 신라 초기 성곽을 확인하다. 양산에는 이 말고도 순지리토성, 신기리산성, 북부동산성과 같은 신라 성곽이 분포한다.

우불산성은 신라가 경주분지를 벗어나 영남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던 과정에서 만든 성곽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적·군사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불산성은 서쪽 천성산(해발 920.2m)을 경계로, 같은 시기에 축조된 순지리토성과 동-서로 나란하게 포진해 신라의 전략적 성곽 배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둘째, 5세기 중·후반 신라가 영토 확장과정에서 토석혼축土石混築 산성을 축조했음을 확인한다.

성벽 바깥쪽 경사각이 40~42°로 기울어진 특징을 보인다. 이는 보통 신라 석축 성벽 경사각이 80° 이상인 것과 비교할 때 현저한 차이다. 외려 토성 외벽 경사와 유사하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신라 성곽이 토축에서 토석혼축을 거쳐 석축으로 이행해 가는 발전 과정을 잘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다. 특히, 이와 같은 토석혼축 기법이 신라 영역 내에서도 영남지역 초기 성곽에서만 제한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그 희소성과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유산으로 평가한다. [내가 비실비실하닥 한 근거다.] 

셋째 6세기 후반, 대대적인 수개축이 있었음을 확인하다. 이 시기 기존 성벽 위쪽을 정리하고선 ‘바른층쌓기’로 성벽을 대체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전형하는 신라 산성 특징을 보인다.

특히, 이 시기에 설치한 성문 외부는 활처럼 둥글게 휘어 돌아가는 호상측벽弧狀側壁 형태로서 동시기 신라가 김해지역에 만든 양동산성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특징이 있다. 이는 대구 팔거산성과도 유사함이 드러나 신라 성곽의 지역적 전개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넷째, 북동쪽 성내부에서 연못과 기타 성내 시설이 확인되다.

이를 통해 당시 우불 지역 사람들이 북문을 주요 출입로로 활용하고, 성내 평탄지를 중심으로 생활 및 운영 시설을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이거 아무리 봐도 조선시대 읍성 공북문 형태다. 실제 신라 왕도는 이를 기준으로 북쪽이다.

나는 전반으로 보아 우불산성은 산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라 귀신집이라 본다.

그렇지 않고선 북쪽 정중앙에다 저런 주축 시설을 마련한 마뜩한 이유를 찾기 곤란하다.

다섯째,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제사 중 소사小祀가 거행된 곳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우불산은 신라의 국가 제사 가운데 하나인 소사小祀가 봉행된 장소로 중사中祀인 가야진사와 함께 양산 지역 산천제사 제장祭場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우불산 국가 제사는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신라가 축조한 경주 북형산성北兄山城에서 국가 중사가 거행되었고, 창녕 화왕산성 등 신라 성곽 연못에서 제의祭儀와 관련된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는 사례로 비추어 볼 때 우불산성이 당시에 제장祭場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 제장 문제와 연동해서 왜 우불산성 주요시설이 공북문인가 해결하는 열쇠일 수 있다.

제장은 항상 북쪽 정중앙, 북극성 자리에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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