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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5

균역법 줄어든 세수의 충당 앞에서도 썼지만, 균역법은 일반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 손실분을 충당한다, 이것이 요지다. 교과서적인 설명을 보자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는데앞에서도 썼지만 선무군관 운운은남아 있는 호적을 바탕으로 정밀한 검토를 바란다. 균역법 이후에 선무군관이 되어 새로 군포 1필을 납부하게 된 이 숫자가 많지 않다. 이 숫자로는 전혀 세수 부족분을 메울 수 없다. 게다가 몇 년만 지나 다시 만든 호적을 보면그나마 있던 이들도 전부 다시 유학이나 업무 등 양반 직역으로 복귀하여선무군관이라는건 불과 몇 년만에 껍데기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균역법이라는게 정말 취지대로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였다면그 세수 부족분은 막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무군관이 무력화했다면도대체 어디서 .. 2025. 9. 7.
호적을 보면 매우 이상한 균역법 1750년 이후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균역법의 실체에 대히 의문을 갖는다. 이거이 실제로 제대로 시행되었던 것일까. 매우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균역법 실시이후 선무군관 숫자가 너무 적다. 실록인지 어딘지 기록에 의하면 균역법을 실시하면 정부 수입이 줄어드니까 이를 메꿔 줄 선무군관은 정부에서 도별로 숫자를 정해 위에서 반드시 채우라고 내려 꽂았다. 그런데 막상 향촌의 호적을 보면 선무군관이 몇 없다는 말이다. 선무군관을 받으면 직역이 그 이전에 유학이건 업무건 업유건 간에선무군관으로 바뀐다. 거의 백프로 이전에는 갖은 방법으로 군역을 회피하던 소위 향촌의 중인들이 대거 충원되었어야 정상인데막상 호적을 보면 선무군관으로 잡혀 들어간 사람이 몇 안 된다. 그나마 이 사람들도 그.. 2025. 9. 6.
느닷없이 얻어터진 유포遊布, 미래를 호시虎視하다 조선후기에는 이른바 저 유포遊布라는 존재가 있다. 쉽게 말해서 한유자閑遊者, 곧 한가롭게 놀고 먹는자에게 군역軍役을 부과해서 포를 걷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양반의 최하말단으로 호적에는 유학을 업무로 삼는다 해서 업유業儒, 무관을 업으로 삼는다 해서 업무業武, 그리고 균역법均役法 시행 시기에는 이른바 선무군관選武軍官, 수포군관收布軍官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호적에는 드물지만 사료에 교생[校生 아닌가?]이라 하는 사람들도 여기 들어간다.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호적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아주 반복무상하다. 어떤 때는 유학을 칭하다가 업유나 업무를 칭하다가균역법이 시행된 직후에는 선무군관이 되기도 한다. 균역법 이전에는 교생이나 업유, 업무라 하여 양반의 말단으로 군역을 원.. 2025. 8. 29.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영조 25년 4월 23일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지난번 의 글 뜻을 물으셨을 때, 신이 형관刑官으로서 비록 감히 우러러 진달陳達할 수 없었사옵니다만, 지금 종용從容하오시니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하옵니다. 고려의 역사야 비록 볼 만한 것이 없지만, 쌓아놓은 재물은 넉넉했사옵니다. 그 때에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를 하면 한 번 쓰는 바가 몇 만 석石 아래로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사오니, 우리나라의 재력財力을 그때와 견주면 애통하다 이를 만합니다.”라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도다." 啓禧曰, 俄者麗史文義時, 臣以刑官, 雖不敢仰陳, 而今則從容, 敢此仰達矣。麗史, 雖無可觀, 而蓄積則有裕。其時八關燃燈之會, 一次所費, 少不下累萬餘石, 我國財力, 比之其時, 則.. 2021. 10. 6.
영조 자신이 내세운 재위 50년의 치적 6가지 앞 사진은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 영조친필이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하는데, 관리처일 뿐이고 실제 주인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원래 관리처는 문화재관리국, 즉 문화재청이 위탁관리케 한 것이다. 제왕은 모든 점에서 모범이 되어야했기에, 비단 영조만이 아니라 조선 역대왕 글씨를 보면 대체로 서예미랑은 전연 거리가 멀어, 멋을 부리지 아니했으니, 그런 점에서 영조 역시 어긋남이 없다. 가끔 글씨 잘 쓰는 임금놈이 있는데, 틀림없이 제왕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탱자탱자 놀다가 엎혀서 느닷없이 왕이 된 경우에 그러하다. 내 보기엔 조선왕조 500년사에서 영조는 세종에 버금하는 성군이다. 그의 손자 정조가 비길 바가 아니다. 나아가 단군조선 이래 가장 노회한 군주로 나는 서슴없이 영조를 꼽는다. 이.. 2019.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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