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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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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5년 4월 23일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지난번 <고려사高麗史>의 글 뜻을 물으셨을 때, 신이 형관刑官으로서 비록 감히 우러러 진달陳達할 수 없었사옵니다만, 지금 종용從容하오시니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하옵니다. 고려의 역사야 비록 볼 만한 것이 없지만, 쌓아놓은 재물은 넉넉했사옵니다. 그 때에 팔관회八關會 ‧ 연등회燃燈會를 하면 한 번 쓰는 바가 몇 만 석石 아래로는 조금도 내려가지 않았사오니, 우리나라의 재력財力을 그때와 견주면 애통하다 이를 만합니다.”라 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도다."


啓禧曰, 俄者麗史文義時, 臣以刑官, 雖不敢仰陳, 而今則從容, 敢此仰達矣。麗史, 雖無可觀, 而蓄積則有裕。其時八關燃燈之會, 一次所費, 少不下累萬餘石, 我國財力, 比之其時, 則可謂哀痛矣。上曰, 然矣。


 

연등회 

 


균역법 시행 이후 재원이 푹 줄어들어 지방의 온갖 잡세를 중앙으로 거두어들이려 혈안이 되어 있었던 영조 중엽, 한 번 부처를 위해 여는 행사에 쌀 몇 만 석을 내던지곤 하던 고려의 모습이 어찌 부럽지 않았으랴.

우리에게 저 정도 돈만 있다면 나라 살림이 궁하진 않을텐데...하면서.

하지만 고려가 그렇게 넉넉한 재정(상대적이겠지만)을 가질 수 있었던 방법, 그리고 그렇게 고려가 돈을 뿌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영조와 홍계희는 알지 못하였다.

아니 알았더라도 성리학 국가의 위정자인 그들은 쉽게 행하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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