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김정기3 창산 김정기, 박정희가 사랑한 건축학도 창산 김정기 박사가 생전에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나는 건축쟁이다. 이런 사람이 남의 무덤이나 팠으니 영 께름칙했다." 그는 원래 일본으로 밀항해서 거기서 고건축을 전공했다.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 발굴에 참여했고 이런 경험들이 나중에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고건축보다는 고고학에서 이름을 아로새기게 한다. 이런 고고학도가 귀국해서는 천마총 파고 황남대총 팠으니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가 국내에 발탁된 데는 황수영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8년인가?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 회담이 진행 중이었고 이 와중에 문화재 반환 분야에서 일한 황 박사가 일본에 갔다가 김정기 박사를 발탁해 국립박물관 고고과장인가로 스카우트한다. 이후 그는 1968년인가 국립문화재연구소 전신인 문화재연구실 초대 실장으로 초빙되는.. 2023. 4. 7. 김재원은 왜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을 반대했던가? (1) 마침내 칼을 빼고 박정희 정권이 1971년 수립하고, 이듬해에 본격 추진하기 시작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한국고고학 지형을 바꿔 놓았으니, 다른 무엇보다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국가주도 발굴이 확실한 우위를 점거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고고학 발굴은 그 규모나 건수에서 미미하기 짝이 없었으니, 그나마 그런 미미한 발굴은 국립박물관이 시종 주도했고, 몇몇 대학에서도 그 나머지를 농가먹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주관광개발계획은 그 양대 축이 보문관광단지 개발과 경주 시내 신라유적 정비였기에, 특히 후자와 관련해 대대적인 국가주도 발굴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추진을 위해 문화재관리국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범정부 기구인 이 종합개발계획은 시종일관 청와대가 주도했고, .. 2019. 2. 3. 사진 석장으로 보는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 사진 석장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가운데 흰모자 쓴 이가 발굴단장 김정기 문화재연구실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왼편으로 차례로 소성옥·김동현·윤근일, 오른편으로 박지명·최병현·지건길·남시진이다. 이들이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파제낀 사람들이다. 저들 중에 김정기 소장은 몇년 전 작고했고, 박지명 선생은 그보다 먼저 갔다. 김정기 소장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없고, 박지명 선생이 여러 일화를 남겼으니, 부산 복천박물관 하인수 관장에 따르면 부산대 건축학과와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중엔 부산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정년한 사람으로 "부산 오룬대고분 발굴에서 유구를 그리드법(grid法)으로 처음으로 실측한 분"으로서, "한평생 기인(?)으로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에서도 실측.. 2019. 1. 25.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