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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사진 석장으로 보는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

by taeshik.kim 201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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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석장으로 1973년 경주 천마총 발굴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가운데 흰모자 쓴 이가 발굴단장 김정기 문화재연구실장이다. 그를 중심으로 왼편으로 차례로 소성옥·김동현·윤근일, 오른편으로 박지명·최병현·지건길·남시진이다. 


이들이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파제낀 사람들이다. 저들 중에 김정기 소장은 몇년 전 작고했고, 박지명 선생은 그보다 먼저 갔다. 


김정기 소장이야 따로 설명이 필요없고, 박지명 선생이 여러 일화를 남겼으니, 부산 복천박물관 하인수 관장에 따르면 부산대 건축학과와 사학과를 졸업하고 나중엔 부산박물관 학예실장으로 정년한 사람으로 "부산 오룬대고분 발굴에서 유구를 그리드법(grid法)으로 처음으로 실측한 분"으로서, "한평생 기인(?)으로 사신 분"이라고 한다. 천마총 황남대총 발굴에서도 실측을 담당했다. 


부단장 김동현 선생은 나중에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했고, 지건길 선생은 이후 박물관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승승장구하다간 국립중앙박물관장까지 지내고선 아직도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으로 현역 근무 중이다. 아주 찔긴 양반이다. 


윤근일 선생은 생평 국립문화재연구소 투신하다 경주연구소장으로 정년 퇴직했고, 최병현 선생은 1980년대 초반 황룡사지 한창 발굴하는 도중에 한남대 교수 자리가 나니 냅다 튀신 양반으로, 이후 모교인 숭실대 사학과로 다시 냅다 튀시고는 그곳에서 정년하고 지금은 그 인근 어딘가서 연구실 차려 놓고 안빈낙도 중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소성옥 선생은 저 발굴 현장에서 최병현 교수와 눈이 맞아 현재까지 같이 살고 계신 것으로 안다. 


저들 중 가장 어린 남시진 선생은 저때가 아마 고교 갓 졸업한 해였을 터이거니와, 역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정년 퇴직하고는 현재 매장문화재 발굴단을 운영 중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경주 토박이다. 


저들 중 김정기 실장과 김동현, 그리고 지건길 세 사람만이 문화재연구실 정식 직원이다. 나머지는? 전부 낙하산이다. 


1936년 생이신가 하는 김동현 선생은 저때 아마 전문위원이 아니었나 하며, 1943년생 지건길 선생은 1962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기로 입학해 그곳을 졸업하고는 68년 11월에 입사했으니, 입사 동기가 김병모, 이종철이다. 지건길 김병모 이종철은 같은 학과인데, 병모 선생이 1기, 나머지가 2기다. 


저들이 정식 시험을 쳐서 학예사가 되었으며, 실력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 시험 제도를 알면, 다 빽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선생인 김원룡이 꽂아넣었다. 

 

천마총 발굴에서 김병모 이종철 조유전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이 이채롭다. 병모 선생은 아마 저 무렵 정재훈 사무관 밑에서 신나게 실상 행정 업무를 할 때이며, 이종철 선생은 대학 재학시에 이미 "나는 땅 파기 싫다. 난 민속학 하겠다" 해서 요리조리 발굴현장은 피해다녔다. 그런 까닭에 이 무렵 강릉 지역 어떤 무덤 하나를 파고는 보고서를 김정기와 공동 이름으로 썼다. 


조유전 선생은 저 무렵 다른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머지는 다 임시직이었으니, 먼저 가장 어린 남시진 선생은 경주 주재 한국일보 기자 우병익 선생이 김정기 실장한테 압력 넣고 꽂아 넣었다. 




그 유명한 천마도를 수습하는 장면이다. 대나무 꼬챙이로 살짝 들어올린 다음 마분지 같은 것을 밀어넣어 들어올렸다. 


왼편에서 차례로 보니, 김정기 지건길 최병현 소성옥, 그리고 그 다음 양반은 모르겠고, 오른편이 박지명 선생이다. 윤근일 선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을 그가 촬영하지 않았나 한다. 


요새 같으면야 오염된다 해서 마스크 쓰고, 장갑 끼고 폼 다 내겠지만, 저 시절엔 저랬다. 






이 사진은 앞 사진 작업이 진행된 직후 천마도를 드러내고는 정리하는 사진이다. 왼편 안경잽이가 최병헌 선생이고, 중간 여사가 소성옥 선생, 오른편이 지건길 선생이다. 


오동나무 박스에 담았다고 기억하는데, 충격 방지를 위해 솜을 깔았다. 저 솜이 나중에 보존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나 하는데 기억에 의존하는 까닭에 자신은 없다. 대꼬챙이로 작업했다. 이 사진 역시 윤근일 선생 작품으로 안다. 


낙하산 얘기 나온 김에 앞서 다루지 않는 다른 이들도 취직 과정을 설명해야겠다. 다 똑같은 낙하산이다. 


최병현 선생은 임병태, 소성옥 선생은 진홍섭, 윤근일 선생은 정영호 낙하산이다. 저들 선생은 저 시절에 다 한국 문화재판을 나눠잡수신 양반들이다. 


최 소 윤 세 선생은 임시직 동기들이다. 


이들은 73년 3월 19일, 김정기 실장을 면담하고 이튿날 괴나리 봇짐을 메고는 시외버스로 경주로 날랐다. 현장에는 김동현 소장이 있었다. 니들 조심해 라는 훈시를 받았다. 


최병현 선생 왈...


학교 졸업하고 할 일도 없어 시골집(아마도 옥구)에 가서 빈둥빈둥거리는데 임병태 선생이 연락이 와서 뵈었더니, 경주에서 큰 발굴 건이 있는데 너 가겠느냐? 해서 갔다고 한다. 그 전까지 고고학의 고자도 몰랐단다. 


경주? 두번째로 갔다. 난생 첨으로 대학 춘계답사 때 경주간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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