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산 김정기 박사가 생전에 자주 하던 말이 있다.
"나는 건축쟁이다. 이런 사람이 남의 무덤이나 팠으니 영 께름칙했다."
그는 원래 일본으로 밀항해서 거기서 고건축을 전공했다.
오사카 시텐노지四天王寺 발굴에 참여했고 이런 경험들이 나중에 국내에서는 그의 이름을 고건축보다는 고고학에서 이름을 아로새기게 한다.
이런 고고학도가 귀국해서는 천마총 파고 황남대총 팠으니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가 국내에 발탁된 데는 황수영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8년인가? 당시 한일국교 정상화 회담이 진행 중이었고 이 와중에 문화재 반환 분야에서 일한 황 박사가 일본에 갔다가 김정기 박사를 발탁해 국립박물관 고고과장인가로 스카우트한다.
이후 그는 1968년인가 국립문화재연구소 전신인 문화재연구실 초대 실장으로 초빙되는데, 이후 그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생을 함께한다.
그가 생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박물관을 나오게 된 원인은 따로 있었다. 텃세 때문이었다고 내가 기억한다.
이후 김정기 박사는 박정희 시대가 본궤도에 오르고, 경주관광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황금기를 구가한다.
박정희가 가장 아낀 문화재계 인사였다.
그가 경주를 찾을 때면 항상 김정기 박사가 수행했다.
1976년인가 경주박물관이 지금 자리에 개관했다.
당시 관장이 정양모 선생이었던가 했다.
정 관장의 회고
"박통이 경주박물관장 개관식에 오셨는데, 이 양반이 글쎄 그 자리에 창산(김정기) 선생을 부르더니, 그 자리서 금일봉을 주시는데, 우리한테가 아니고 창산한테 주더라고...이것 참..."
그만큼 김정기는 박정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한국고고학에서 창산은 내 보기엔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중 한 명이다.
혹자는 삼불 김원룡은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하며 적지 않은 족적이 있기는 하나,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삼불은 내 보기엔 미술사학도 성향이 강하지 고고학도로 보기에는 저어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파른 손보기 박사는 더 독특한 면이 있는데 이 양반은 맨손으로 고고학, 특히 구석기 고고학을 개척했다.
고고학을 모르던 사람이 느닷없이 삽자루 들고 구석기에 뛰어들어 석장리를 발굴했으니, 신화에 가까운 인물이다.
발굴하면서 고고학을 습득했다. 눈물겨운 투쟁이었다. (201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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