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김준엽6 귀국 거부하고 중국에 눌러앉았다는 김준엽 해방 후 김준엽은 한국으로 돌아가 정치에 참여하자는 이범석의 제안을 거절하고 중국에 남았다. 머리 숙일 줄 모르는 자신의 성격이 정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그는 1946년 만 22세 나이에 국립동방어문전과학교國立東方語文專科學校(약칭 동방어전東方語專) 전임강사로 부임하며 학계에 발을 내디뎠다. 1942년 설립된 동방어문전과학교는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교육하기 위해 중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외국어대학이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비슷하게 보면 되겠다. 동방어전은 1946년 최초로 한국인 교수를 채용하여 한어과를 설치 운영했으니 김준엽은 1946년 한어과韓語科 전임강사로 부임해 1948년말까지 3년간 재직한다. 동방어전 한어과는 중국 내 한국학 교육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1948년 9월 자신의 못다한 꿈인 .. 2023. 9. 19. 國原, 충주가 본관인 김준엽이 창안한 새로운 성씨 창씨개명의 역설, 김준엽의 경우일본이 얽힌 한국 근대사에서 일어나는 곡해가 한둘이랴만 안중근이 탕탕탕 해서 보내버린 이등박문을 한국침략 원흉이라 하나 실은 이등은 병합반대론자다. 조선 병합한다 하니 방귀께나 낀 historylibrary.net 앞선 글에서 평안도 강계 출신이 김준엽이 게이오의숙 예과 재학시절 국원상광國原常廣이라고 창씨개명했다고 소개했거니와 그가 국원國原이라는 새로운 성씨를 창작한 유래를 내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이건 이 블로그 파워 필자 외우 신동훈 박사 지적인데 저 성씨는 충주의 옛 지명 국원에서 따다 썼다. 김준엽은 본관이 충주다. 비록 창씨개명했지만 뿌리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常廣이란 이름도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다. 2023. 9. 18. 김준엽의 장정長征 평안북도 강계에서 1923년 8월 26일 태어난 김준엽金俊燁은 신의주고보를 거쳐 게이오대학慶應의塾 예과豫科에 입학해 그 2학년 혹은 3학년 재학 중인 1943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1944년 2월 25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 동쪽 다쉬자大許家 경비대에 배치된다. 한달 남짓만인 그해 3월 29일 일본군을 달출해 한즈둥(한치륭韓治隆) 사령관이 이끄는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한다. 1944년 9월, 중국군 유격대를 떠나 린찬(임천臨泉)의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교해 같은해 11월 훈련반을 졸업하고는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고는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까지 6천리 장정을 시작한다. 두 달여 장정 끝에 1945년 1월 31일 충칭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2023. 9. 17. 고려대박물관이 정리한 김준엽金俊燁(1923~2011) 약력 金俊燁 1923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출생 1944년 1월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퇴 1944년 2월 중국 장쑤성 쉬저우시 다쉬자의 일본군 경비중대에 배치 1944년 3월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유격대에 참가 1945년 1월 6,000리 장정을 거쳐 충칭의 임시정부에 합류 1945년 8월 미국 전략첩보국 OSS 요원들과 함께 한미공동작전에 참가 1946년~ 1948년 중국 국립동방어문전과학교 한국어과 강사 1948년 9월 중국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입학 1949년~1982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1951년~1955년 타이완 국립타이완대학에서 연구 1958년~1959년 미국 하버드대학 객원교수 1959년~1961년 사상계 제3대 주간 1957년~1982년 아세아문제연구소 발기인, 부.. 2023. 9. 17. 나이를 세 살이나 끌어올린 김준엽 학병 징집 중에 장준하와 더불어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가고 훗날 고려대 총장을 역임하는 김준엽金俊燁은 1920년 생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 각종 공문서에도 그리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그 자신이 그렇게 주장했다. 위키피디아 사전에서는 그의 생몰을 1923년 8월 26일 ~ 2011년 6월 7일로 적었으니, 이는 새로운 사실이 반영된 것이라 보아야 할 성 싶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1920년으로 볼 경우 문제도 없지 않아 보통 코스를 밟았다면 학병 징집 무렵엔 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나이가 학병으로 징집되기엔 적지는 않으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1943년 발급된 게이오대학慶應義塾 학생증을 보면, 그의 출생년이 1923년으로 적혔다. 나아가 이때 그가 파고 다닌 명함을 보면 본과가 아니라 예과豫科였으니 .. 2023. 9. 17. 민연이 비판한 아연, 김준엽을 업고 나오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약칭 아연은 대학 부설 기관으로 연원이 깊고 그 성과 또한 만만찮아 그 명성과 역사는 단순한 특정 대학 부설 연구소의 그것을 뛰어넘는 상징이 있다. 한데 이와 맞먹는 연구소가 같은 고려대 내부에 있다는 점에서 두 기관은 아주 묘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민족문화연구원 약칭 민연이 그곳이라 두 기관은 비슷한 시기에 생겨나고 각자 다른 분야에서 특화했지만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다. 명칭에서 드러나듯 아연이 국경 너머를 지향한다면 민연은 민족 내부를 파고 든다. 구체로 보면 아연은 중국학이 중심이다. 그건 그것을 만든 주축 김준엽 개인성향과도 무관치 않다. 그런 아연이 김준엽 탄생 백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현창사업을 들고 나왔다. 나는 이를 좀 다른 시각에서 보고 싶다. 일전.. 2023. 6. 7.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