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문무왕10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발견 50주년 문무왕 수중릉은 실재인가 신화인가? 김태식 |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3월 호 2001년 4월 28일 오후 KBS 역사스페셜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편을 시청하다 눈을 의심하는 장면을 마주했다. 대왕암을 발굴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방송사가 말이다. 물론 발굴 자격이 없는 방송사가, 그것도 신라 문무왕 수중릉이라 해서 1967년 5월 15일에 소위 ‘발견’되고 같은 해 7월 24일 국가사적 제158호로 이름을 올린 대왕암을 직접 발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방송사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분명 발굴 시행처는 KBS였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방송사가 나서서 직접 발굴하는 일은 견문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금시초문이.. 2018. 1. 20.
[추적, 한국사 그 순간 -11-] 이세민-김춘추 외교 밀약 문무왕, 초강대국 唐에 당당히 맞서 한민족 토대 마련[중앙선데이] 입력 2017.04.02 02:39 수정 2017.04.02 03:47 | 525호 23면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위해 국운을 건 전쟁에 나섰을 때, 당(唐)은 유일한 세계제국이었다. 당시 당은 냉전시대 동서 양쪽을 양분한 맹주들인 미국과 구소련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비축한 세계제국이었다. 혼자 힘으론 숙적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하기 버거웠던 신라는 이 세계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통삼한 전쟁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이를 위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당과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에는 마침내 고구려마저 쓰러뜨림으로써 통일을 달성한다.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 차지’밀약 깨고 야욕 드러낸 당에 맞서.. 2018. 1. 20.
[추적, 한국사 그 순간 -5-] 수수께끼 신라 재상, 김양도 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염촉은 바로 이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말한다.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자 법흥왕과 이차돈이 벌인 게임, 다시 말해 이차돈이 스스로 목숨을 청해 잘려나간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골자.. 2018. 1. 20.
김유인의 70세 치사致仕(정년퇴직)와 생일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이르기를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치정이란 글자 그대로는 정사政事를 놓는다는 뜻이니 흔히 치사致仕라 한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2018. 1. 2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