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민둥산3 무악재를 오르는 사람들 서울에서 은평 쪽으로 가는 여정 첫 고개인 무악재를 사람들이 오른다. 사진을 촬영한 지점이 무악재 정상임은 분명한데, 저 방향이 서울 쪽인지, 반대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은평 쪽 방향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이 모습이 조선 전기 이래 전통적인 이동 방식이었다. 산림은 이미 17세기 중반 이래 거덜난 그 모습이라, 온 산에 멀쩡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온 국토가 사막이라,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 보는 풍광이랑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비가 오면 다 녹아 내렸으며, 길바닥은 진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산림녹화사업과 아스팔트 건설, 그리고 아파트 문화가 왜 혁명인지는 실감한다. 우리는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한다. 1907년 9월,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잔.. 2019. 10. 15. 1925년 을축년대홍수 이전 풍납토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유리건판 사진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 풍납토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더불어 1910년대 이 산하가 어떤 몰골인지를 엿보는데도 중요하다. 아차산에서 한강 너머 풍납토성을 바라본 장면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천둥벌거숭이 민둥산 붉은산이다. 이런 환경에서 도굴은 일상화한다. 봐! 도굴하기 지기잖아? 2019. 9. 17. 경관은 만드는 것이지 자연이 주는 선물은 아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하지만 이 구절이 들어간 애국가 가사와 곡조가 등장할 적에 한반도 삼천리는 화려한 강산과는 거리가 전연 멀어, 온통 천둥벌거숭이였으니, 그리하여 매양 비가 조금만 내려도 곳곳은 사태(沙汰)로 물바다가 되기 일쑤였고, 그것이 초래한 매몰에 인적·물적 희생이 다대했다. 사태는 강바닥 상승을 부르기 마련이라, 그만큼 물난리에 고통이 더 컸던 것이다. 김동인이 말한 '붉은산'이 그 무렵을 우뚝히 증언하는 말이었다.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70년대 온 산하가 그렇게 붉었으니, 산허리는 곳곳이 여드름 자국 잔뜩한 곰보 같았다. 70년대를 회고하는 사람들한테 익숙한 다른 우리 주변 풍경에 백사장(白沙場)이 있다. 당장 내 고향 김천만 해도,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감천이라는 지류가 있어, 그것.. 2018. 9. 17.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