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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무악재를 오르는 사람들

by taeshik.kim 2019.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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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은평 쪽으로 가는 여정 첫 고개인 무악재를 사람들이 오른다. 


사진을 촬영한 지점이 무악재 정상임은 분명한데, 저 방향이 서울 쪽인지, 반대편인지는 확실치 않다. 은평 쪽 방향이 아닌가 한다.  


결국 이 모습이 조선 전기 이래 전통적인 이동 방식이었다. 


산림은 이미 17세기 중반 이래 거덜난 그 모습이라, 온 산에 멀쩡한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온 국토가 사막이라,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서 보는 풍광이랑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비가 오면 다 녹아 내렸으며, 길바닥은 진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면 산림녹화사업과 아스팔트 건설, 그리고 아파트 문화가 왜 혁명인지는 실감한다. 


우리는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한다.  


1907년 9월, 주일본 독일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잔더(Hermann Gustav Theodor Sander.1868~1945)가 한국 방문시에 촬영한 것으로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돼 있다.




무악재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술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아래 기술 내용에 손볼 데가 더러 보인다. 


무악재(毋岳─)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고개.   

이칭 : 모래재, 사현, 길마재, 무학재, 무학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정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 사이에 있는 고개.


무악재는 안산(鞍山, 296m)과 인왕산(仁王山, 338m) 사이에 있으며, 의주가도(義州街道)인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안산과 인왕산은 화강암 산지이고, 무악재는 두 산 사이에 형성된 안부(鞍部)이다. 무악재는 여러 번에 걸쳐 깎여 고개가 점점 낮아졌다.


무악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는 모래재 또는 사현(沙峴)이라고 불렸다. 또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이 어린 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별칭으로 무학재 또는 무학현이라고도 한다. 이는 이성계가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무악의 남쪽을 도읍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일부에서 명당이 좁다고 반대를 하였고, 결국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밑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조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역사를 시작하고, 이 고개에 올라서서 명릉을 바라보며 고개의 이름을 추모현(追慕峴)이라고 하였다. 명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 안에 자리잡고 있다.


무악의 정상에는 조선시대의 봉화터가 두 군데 있다. 이곳의 봉화대는 평안도·황해도는 물론, 부산·회령까지 급보를 전하였다. 무악재는 조선시대에 의주와 통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지금도 서울 시내와 서대문 외곽을 연결하는 주요 고개이다.


참고문헌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서울특별시동명연혁고』Ⅲ(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1977)

한국지명총람 (한글학회, 1966)

집필 (1995년) 김연옥



Muakjae (mu- ak - jae ) is the hill or pass located between Mt. Ansan (296m) and Mt. Inwangsan (仁王山, 338m), Seosangmun-gu, Seoul. Currently, National Road No. 1 is along this path.


Muakjae was the main transportation route from Seoul to Euiju passing Pyeongyang during the Joseon Dynasty period. It is still the main route connecting Seoul downtown with the outskirts of Seodaemun-gu. 


The photo was taken in September 1907 by Hermann Gustav Theodor Sander (1868-1945), a military attache to the German Embassy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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