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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여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扶餘扶蘇山城出土金銅光背)에 대한 나의 중간 결론 1. 扶餘 扶蘇山城 東門址 出土 金銅光背 뒷면 銘文은 ‘何多宜藏治佛’이며, 그 意味는 “하다의장(何多宜藏)이라는 사람이 佛像을 造成했다”는 뜻이다. 이를 從來에는 ‘何多宜藏法師’라고 읽은 것은 明白한 誤讀이다. 2. 이 金銅光背를 裝着한 佛像을 만든 ‘何多宜藏’은 6~7世紀, 主로 佛像을 만드는 일에 專門的으로 從事한 匠人 姓과 이름이다. ‘何多’가 姓氏다. 3. 이는 古代 日本에 登場하는 韓半島 渡來系 有力 家門 중 하나인 ‘하타..
부여 능안골 고분군 발굴성과(2018.5.28) 부여 능안골 고분군에서 백제 귀족층 무덤과 매장행위 확인- 굴식돌방무덤에서 최초 매장행위 이후 파묘(破墓) 혹은 이장(移葬) 행위 확인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은 부여군(군수 권한대행 한영배)과 함께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으로 '부여 능안골 고분군(사적 제420호)‘에 대한 정밀발굴조사 결과, 백제 시대 귀족층의 무덤과 매장행위를 확인했다.  * 발굴현장: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10 일원‘부여 능안골고분군’은..
해루(解婁)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온조왕본기 :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북부의 해루(解婁)를 우보로 삼았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3(백제본기 제1) 다루왕본기 : 7년(서기 34)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죽으니[卒] 나이가 90세였다. 동부의 흘우(屹于)를 우보로 삼았다.
간위거(簡位居) 三國志 권30 魏書 30 東夷傳 夫餘 : 夫餘는 본래 현토玄菟에 속했다. 漢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했다. 이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王이 되었다. [簡位居에게는] 適子가..
마여(麻余) 三國志 권30 魏書 30 東夷傳 夫餘 : 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王이 되었다. [簡位居에게는] 適子가 없고 庶子 마여(麻余)가 있었다. [簡]位居가 죽자, 諸加들이 함께 麻余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 牛加의 兄[벼슬에 있는 사람]의 아들도 이름이 位居였는데, 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쳤다. 正始 연간(A.D.240~248; 高句..
의려(依慮) 三國志 권30 魏書 30 東夷傳 夫餘 : 마여(麻余)가 죽고,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依慮)를 세워 王으로 삼았다.
김태식의 考古野談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김태식의 考古野談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2017년 06월 호사비 도읍기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로 지목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 지점에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있다. 모양이 조금은 독특해 전체로 보면 둔덕을 파고 들어간 땅굴 형식이다. 아마도 사비 시대 백제 무덤 전형이 주로 산기슭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다 돌을 쌓아 묘실(墓室)을 마련한 데서 착상한 디자인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