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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사역寺域 발굴상황을 논할 때 항용 인용하는 국립부여박물관 사진이다.
부여박물관이 펴낸 발굴보고서에도 그대로 수록됐다.
이거 합성이다.
능산리사지가 이렇게 한꺼번에 노출된 적은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이 합성이란 사실은 보고서 어디에도 없다.
자칫 역사 조작 논란을 부를 만한 사안이다.
합성임을 밝혔어야 한다.
널리 알려진 능산리사지 백제금동대향로 출토 장면이다.
여러가지 방식으로 노출 등을 조정해보니 야간 발굴이었음이 더욱 명백해진다.
후래시를 썼던 것이다.
금동대향로는 한밤중에, 그것도 한겨울에 물이 나는 땅을 맨손으로 헤집고 발굴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이 사진은 지금은 세종문화재연구원 실장으로 있는 진성섭이 했으며,
실제 맨손 발굴은 조사연구단장 at 서라벌문화재연구원인 차순철이 했다.
뽀샵은 은폐만이 아니라 폭로 기능도 있다.
이 부여논산가도는 백제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결정타였거니와 이 도로 개설을 즈음해 비로소 부여 나성이 속살을 드러냈다.
나아가 가도가 지나는 근처를 따라 백제고분이 밀집한다는 사실도 비로소 드러났으니,
능산리 고분군이 문화재로 재발견된 것으로 이때였고, 그 인근 다른 고분군들도 이때서야 존재를 드러냈다.
언제 짬이 나면 이 가도의 역사 자체를 정리하픈 생각도 굴뚝처럼 솟아난다.
하지만 해직시절, 부여군에서 의뢰한 능산리 고분군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하도 질린 까닭에 당분간은 숨고르기가 필요할 듯하다.
첨부 유리건판 사진은 틀림없이 그 가도가 통과하면서 절개한 나성 동문, 능산리사지 인접 지점인 듯한데, 자신은 없다.
현재의 지도로써 그 지점을 표시하면 다음이다.
당시 시굴조사를 윤무병 선생이 했는데, 이전에는 논밭이었다. 이런 사정은 식민지시대라 해서 다를 바 없었으니, 첨부 사진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 유리건판 사진은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촬영한 것으로, 사지를 찍으려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성 동문을 담기 위한 구도로 포착되었다.
지금의 사지가 어딘지는 단박에 알리라. 계단식 논이 조성된 저곳이 바로 그곳이다.
저 아래 향로와 석조 사리감이 잠자고 있었다.
사진 촬영지점을 지도에 표시하면 아래 어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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