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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3

고려의 사민徙民과 발해민의 투항 1. 고려전기는 조선전기 만큼이나 활발히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고려 태조의 건국 이후 약 100년간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것은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락되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지는 않으니 대표적인 것이 아래 몇 가지다. 서경에 사민하라는 전교 (918년):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경에 고관대작 집안을 이주시키라는 전교 (922년):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라는 전교.. 2022. 12. 24.
사민徙民... 농업국가의 영토개척법 우리 역사는 만주를 상실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지 사실 지속적인 영토확장의 역사이기도 했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영토는 계속 북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농업국가이다. 이 때문에 영토가 확장된다는 것은 곧 徙民의 역사이기도 했다. 문제는 徙民을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땅으로 이식된 사람들이 제대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이들을 지켜낼수 있는 군병력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려 조선시대 영토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농민과 군병력을 동시에 전진시키는 병진정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할수 있다. 조선시대 사민정책을 보면, 눈물겨운 부분이 있다. 새로 영토로 추가된 압록강 두만강 일대의 땅을 지키기 위해 삼남 지방에서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였다. 세종대에는 한.. 2022. 12. 23.
피안彼岸으로서의 사막과 초원, 그리고 실크로드 나는 북방과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을 초원에 대한 열망이라고 본다. 그래서 걸핏하면 우리는 알타이 민족의 시원을 찾는답시며 바이칼 호수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서역 혹은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사막과 오아시스에 대한 열망의 표출이라고 본다. 초원과 사막은 한국 문화권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그런 우리에게 각인한 유목과 사막은 진취와 광활, 야성, 그리고 원시의 표상이다. 사막과 초원을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강인하다는 이미지로 우리는 각인했다.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관심 없다. 아니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늘 그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표상들로써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사막과 초원에서 우리의 억눌린 욕구를 분출하려 했는지도, 혹 하려는지도 모른다. 중국에는 늘 사대.. 201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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