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전기는 조선전기 만큼이나 활발히 북진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고려 태조의 건국 이후 약 100년간 압록강 하구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흥미로운것은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누락되었을 수도 있지만, 완전히 없지는 않으니 대표적인 것이 아래 몇 가지다.
서경에 사민하라는 전교 (918년): 丙申 諭群臣曰,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宜徙民實之, 以固藩屛, 爲百世之利.” 遂爲大都護, 遣堂弟式廉, 廣評侍郞列評守之.
서경에 고관대작 집안을 이주시키라는 전교 (922년): 是歲, 徙大丞質榮·行波等父兄子弟, 及諸郡縣良家子弟, 以實西京. 幸西京, 新置官府員吏, 始築在城. 親定牙善城民居.
남쪽 백성을 북쪽으로 옮기라는 전교 (1019년): 庚申 徙江南州縣丁戶, 以實象山·伊川·遂安·新恩·峽溪·牛峯等縣. (그런데 사민되는 지역은 황해도 지역으로 새로 얻는 영토에 대한 사민은 아닌듯 하다)
2. 하지만 이 동일한 시기에 고려의 국경은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갔다.
아래 그림에서 "고려초기의 국경"과 "통일신라의 국경"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이 지역이 고려전기에 새로 추가된 영역으로 고려초기의 국경은 천리장성이 완공된 1044년에 해당한다.
적지않은 크기의 영토인데 사민 기사는 생각보다 많이 없다.
3. 그렇다면 고려는 저 넓은 땅을 어떻게 지킨것일까? 조선시대에 비교하면 사민에 대한 기록도 많지 않은데 말이다.
그 해답은 이렇다. 아래 링크를 보자.
4. 해답은 간단하다. 천리장성이 완공되는 1044년 경까지 발해인의 유입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발해인 유입은 규모가 엄청나서 한 번에 수만 명씩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고 사서에 기록된 것만 대략 10만명을 헤아린다. 아마 실제 유입 인구는 더 많았을 것이다.
5. 이로부터 두 세대가 지난 12세기 초. 잘 알려진 윤관 북벌이 있었다.
이 당시에는 이미 발해민 유입이 끝난 터라, 새로 획득한 9성 지역에 대한 방어는 남쪽으로부터의 사민 정책에 의존해야 했다.
조선시대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바로 그 사민이 되겠다.
윤관의 9성 지역에 대한 사민은 이른바 "조선왕조형 사민정책"의 시발이라 할 만하다.
이 당시 기록을 보면,
윤관이 동북 9성을 축조하고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다
윤관(尹瓘)이 포로 346구(口)와 말 96필, 소 300여 마리(頭)를 바치고 의주(宜州)와 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의 2진과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와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북계(北界) 9성이라 하였으며, 모두 남계(南界)의 민(民)을 이주시켜 성을 채웠다.
하였고,
이에 6성(城)을 새로 설치하였으니,
첫 번째는 진동군(鎭東軍)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로, 병민(兵民)이 1,948정호(丁戶)이다.
두 번째는 안령군(安嶺軍) 영주방어사(英州防禦使)로 병민이 1,238정호이다.
세 번째는 영해군(寧海軍) 웅주방어사(雄州防禦使)로 병민이 1,436정호이다.
네 번째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로 병민이 680정호이다.
다섯 번째로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로 병민이 632정호이다.
여섯 번째는 공험진방어사(公嶮鎭防禦使)로 병민이 532정호이다.
하였으니 9성 전체는 아니고 새로 지은 6성에 들어있는 병사와 백성 수가 대략 6천~7천 호 정도 되니, 인구로는 3만5천~4만 명 내외가 있었을 것이다.
9성 전체 인구가 10만명이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겠다.
6. 고려전기 북진과 윤관 북벌은 이만큼이나 성격이 다르다.
발해 멸망 여파로 그 유민 유입으로 이루어진 것이 전자라면, 후자는 온전히 남방으로부터의 사민에 의존한 것으로 이 후 조선시대 북방개척의 선구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7. 이렇게 보면, 고려 전기 북진이 이루어지던 당시, 남방으로부터의 사민이 특별히 관찰되지 않는데도 지속적으로 북쪽으로 확장이 이루어진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바로 같은 시기 무더기로 넘어오던 발해 유민을 새로 추가되는 영토에 그대로 식민한 것이다.
고려 전기 북진은 발해유민의 유입 없이는 불가능했거나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8. 압록강에서 서경까지 이어지는 지역에는 구 발해유민 밀도가 매우 높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했을 때 처음 맞닥드려야 할 사람들은 바로 북방에서 고려로 유입되어 서경 이북에 식민된 구 발해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9. 보는 시각에 따라 천리장성 축조야말로 한국사에서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전기까지 이어지던 발해민 유입이 천리장성이 축조될 즈음에는 거의 종식되어 있었고, 만주에는 더이상 예맥계 주민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 한편으로 고려가 천리장성을 만든 것은 이제 남만주지역은 "우리" 가 아닌 "저편"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겠고, 이 시기부터는 만주지역의 주민들은 더 이상 "포용"의 대상이 아니라 "구축"의 대상으로 전환된 것이었겠다고 본다.
한국사에서 만주가 떨어져 나간 것은 엄밀히 이야기 하면, 발해 멸망이 아니라 고려의 천리장성 축조다.
천리장성 축조는 만주를 피아간 구별에서 피의 영역에 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 편집자注 ***
고려 전기에는 사민 기사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논급이 있다. 이는 누락이다.
고려실록은 목종 시대에 거란의 침입으로 모조리 불타 버리게 되는데, 그리하여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이 선대 7대 기록은 소략하기 짝이 없어 다 뜯어먹고 남은 헤밍웨이 다랑어 같다.
덧붙여 저 윤관의 9성 정벌과 그에 따른 실패를 밤눈을 까며 분석한 이가 훗날 나타난다. 그가 바로 조선 세종 이도다.
그는 왜 고려는, 왜 윤관은 종국에는 북방 개척에 실패했는가를 눈을 부라리며 연구했다.
그의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철저한 사민이 따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진단이 나왔으므로, 대책도 그에 따라 나오기 마련이다. 예서 그의 포학함이 드러난다.
첫째, 내가 저짝을 정벌하면 모조리 조선 인민으로 채울 것이다.
둘째, 나는 윤관보다 더 밀어올리련다. 이를 위해 그는 역사를 조작했다. 윤관이 개척한 데는 저쪽 백두산 두만강 너머다!!!
그의 계획은 실로 담대했다. 그는 이를 밀어부쳤다.
남북한을 합친 지금의 한국은 세종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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