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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9

진실로 미친 시대였던 17세기 도대체 어떻게 하자고 그렇게 죽도록 미치도록 성리학을 팠을까. 어떻게 하자고 그렇게 중국도 없어져버린 고례古禮를 여기다 구현한다고 남들 안보는 책을 죽도록 봤을까. 17세기란 시대는 진실로 미친, 제정신이 아닌 시대였는데, 한국이라는 나라가 수천년, 수만년 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온다면 그 최후의 날까지도, 한국인들은 17세기를 두고두고 반성하면서 살아야 한다. 2023. 4. 18.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성리학 중국 사상투쟁사에서 특이한 점은 불교가 도입한 이래, 그 쟁투는 시종 도불 투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더 특이한 점은 이미 불교 도입과 더불어 중국 주류 사상사를 道·佛·儒의 세 흐름으로 당시 이데올로그들이 간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문제는 이 사상 투쟁에서 언제나 유교는 방관자였다. 왜인가? 유교에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없으니, 그것으로 둘이 싸운 판국에 유교가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었다. 이 결함을 예리하게 인식하면서, 우리도 인식론과 존재론을 구축하자 해서 들고 일어난 흐름이 바로 당말에 겨우 한유와 이고가 발판을 마련하고 송대에 들어와 활개를 치게 되는 성리학이었다. 당말 혹은 송대 이전 유학에서 心을 논한 글 없다. 있어도 애들 장난 수준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2023. 1. 17.
일본 성리학 도입시기에 대한 논의 일본사를 보다 보면 일본에 성리학 도입시기에 대해 남북조시대를 지목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고다이고천황과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사상이 성리학의 정통론에 입각하고 있는 바, 남북조시대의 남조정통론이 성리학의 영향 하에 성공했다는 시각이다. 이를 이유로 일본의 성리학 도입시기는 남북조시대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에 대해서 한마디로 평하자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리학이 뭔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정통론은 성리학의 아주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주장이며 남북조시대의 근왕론과 같은것은 굳이 성리학에 그 연원을 댈 필요도 없다. 성리학 성립 이전에 이미 근왕론은 유교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성립될때까지 성리학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대해 전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고 이.. 2022. 12. 3.
해동공자였다는 최충의 미스테리 최충이라는 양반이 있다. 고려시대 문관으로 과거급제 후 문하시중으로 영달하고 학자로도 크게 성공한 분이라고 한다. 해동공자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대단히 추앙받은 사람임은 분명한데 무신란의 여파인지 내가 알기로 문집 한권 전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최충이 만들어서 학생을 가르쳤다는 문헌공도를 보면, 이 사설학원은 9개 재齋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낙성재(樂聖齋) 대중재(大中齋) 성명재(誠明齋) 경업재(敬業齋) 조도재(造道齋) 솔성재(率性齋) 진덕재(進德齋) 대화재(大和齋) 대빙재(待聘齋) 등이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9재 이름 중 대중, 성명, 경업, 솔성, 대화 이렇게 다섯은 아마도 중용에서 이름을 따오지 않았나 싶은데 사실 이 용어 자체는 그 이전부터 있기야 했지만 이 .. 2022. 11. 21.
이재난고, 실학자로 포장된 성리학도 황윤석의 일기 학자들은 이재 황윤석을 실학자라고 주장하지만 철저한 성리학자였다. 그의 실사구시 자세가 바로 성리학자의 기본이었으나 그에 대한 몰이해로 그를 실학자라는 틀에 구겨 넣으려고 한다. 그의 《이재난고》는 독특한 일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그는 한 번 쓰면 화석처럼 퇴적되어버리는 일기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작성된 일기를 이후에도 자꾸 수정 보완하여 완성된 연구노트를 만들고자 했다. 그가 일기를 쓸 때 시종 견지한 태도를 《이재난고》 권17 에 적어두었으니, "조정의 일을 쓰지 않고, 잡스러운 사람의 말을 쓰지 않고, 성인의 말씀이 아니면 쓰지 않고, 허원한 주장을 쓰지 않는다.[勿書朝廷事 勿書雜人語 勿書非聖言 勿書虛遠說]" 는 것이었다. *** 편집자주 성리학과 실학을 맞장뜨게 하는 구도는 .. 2022. 11. 11.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8)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불교식 상장례를 타파하고 주자가 정리한 주자가례를 조선의 공식적인 매장 방식으로 채택했다고는 하지만 조선 바닥 그 누구도 회곽묘를 실제로 만드는 방법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회곽묘에 사용한 재료. 위에 보이는 재료 중에 석회·모래·황토를 삼물三物이라 부르는데 이것으로 섞어 관 주위에 다져두면 굳어 회곽이 된다. 마사토는 무덤 주변의 생토층을 상징한다. 회곽묘는 지배계층의 대 불교 "사상투쟁" 과정 중에 채택된 묘제이므로 회곽묘는 조선 계급사회의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부터 아래로 그 유행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 회곽묘는 "국조오례의"의 흉례 "치장" 편에도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으니까 국초에 이미.. 2019.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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