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이라는 양반이 있다.
고려시대 문관으로 과거급제 후 문하시중으로 영달하고 학자로도 크게 성공한 분이라고 한다.
해동공자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대단히 추앙받은 사람임은 분명한데 무신란의 여파인지 내가 알기로 문집 한권 전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최충이 만들어서 학생을 가르쳤다는 문헌공도를 보면, 이 사설학원은 9개 재齋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낙성재(樂聖齋)
대중재(大中齋)
성명재(誠明齋)
경업재(敬業齋)
조도재(造道齋)
솔성재(率性齋)
진덕재(進德齋)
대화재(大和齋)
대빙재(待聘齋)
등이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9재 이름 중 대중, 성명, 경업, 솔성, 대화 이렇게 다섯은 아마도 중용에서 이름을 따오지 않았나 싶은데 사실 이 용어 자체는 그 이전부터 있기야 했지만 이 개념, 중, 성, 경, 성, 화 이런 부분들이 철학적으로 크게 현창되기는 성리학이 성립된 후부터라고 생각한다.
송대 성리학자들이 도학을 창시하면서 사서를 추앙했는데 이때 성, 경, 성, 중, 화의 개념이 크게 현창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최충 시대에 이런 용어들이 나오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최충의 활동 연대는 무려 984-1068년이다.
동시기 북송 유학자들의 활동연대를 보면,
소옹 1011-1077
장재 1020-1077
주돈이 1017-1073
정호 1035-1085
정이 1033-1107
로서 최충이 더 빠르다.
물론 이 개념 자체도 유학에 기반한 만큼 북송 유학자 이전에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수많은 경전에서 하필 예기에 묻힌 대학, 중용을 논어, 맹자에 합쳐 사서로 현창하면서 크게 각광받은 이런 개념들이 최충의 9재 이름으로 쓰인 것은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동시기에 중국과 실시간 동기화가 되고 있었거나,
아니면 후대에 9재의 이름이 잘못 전해졌거나, 둘중의 하나 일거라고 본다만,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으니 이 정도 해두고자 한다.
*** 편집자注 ***
필자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송대 성리학에서 비로소 제 위치를 잡는 용어를 그 이전 시대 최충이 사설 학교 이름으로 썼다는 건 믿기 어렵다? 이런 맥락 아닌가 한다.
다만, 송대 성리학 역시 어느날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요 그 연원을 거슬로 올라가면 중당 한유와 이고에 닿는데, 이 두 사람이 중용을 이미 따로 떼어내 중시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최충이 내세운 유학은 중당 이래 송대 본격 성리한 출현 이전 유학 세례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저 지적은 최충의 학문 연원이 어디인가를 추적할 때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 저 재 이름으로 미루어 최충은 한유 이고를 달달 외웠음을 안다. 다시 말해 최충은 한유 이고를 사숙했다!!!
***저자회신***
한유와 이고를 사숙했을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위의 9재의 이름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최충은 古文과 태동기의 신유학에 공명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중국의 사정에 밝았다고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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