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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3

손바닥 만한 땅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시대 시대가 흘러 조선후기쯤 되면 손바닥 만한 땅이라도 비료를 갈아 넣고 때려 부어 매년 농사를 지어 수확을 거두는 일이 가능했겠지만 우리나라는 조선 전기까지도 휴한 농경이 극복이 안 되고 있었다.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거의 반드시 일정기간마다 농사를 쉬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건 무슨 뜻이냐. 손바닥 만한 땅 가지고 있는 이들이 그 땅 부쳐서 먹고 살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농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는 땅과 농사짓는 땅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니 농사의 기본 단위가 커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휴한농경을 할 수 없는 소토지 소유자는 어차피 그 땅 가지고 있어봐야 먹고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휴한 농법이 토대로 되어 있는 사회는 장원의 출현이 필연적이었다는 뜻이겠다. 이는 무슨 소리냐 하면, .. 2024. 7. 25.
미군이 해체한 일본의 지주-소작제 우리는 식민지 조선의 전근대적 지주-소작제가 미군정-이승만 정권 당시의 토지개혁으로 비로소 종식되었다고 본다. 이 사실 자체는 부정할 생각이 없다. 남한의 경우 이 토지개혁으로 사실상 그 후의 발전과 도약의 기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다.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미군정이 일본에서 똑같은 토지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미군정은 일본 전국의 지주들로부터 토지를 유상 매입하여 이를 일본 내 소작인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하여 오랫동안 자행된 일본의 소작농 관행에 사실상의 종지부를 찍었다. 일본은 20세기 전반 제국주의를 경과하는 동안에도 조선과 다름없이 전근대적인 토지 소유구조-지주와 소작인 관계가 전국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024. 5. 7.
무지렁이 소작농을 주문하는 역사 식민지시대에 조선에 사는 조선인으로 좀 배웠다는 사람으로 이른바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는 사람들은 거개 열라 부자였다. 그 재산은 거개 조선시대 이래 선대에서 물려받았으니 거개 지주였다. 이 사람들은 거개 조선시대 산림처럼 소작료 따박따박 챙기며 고향에서 은거하며 지내거나 혹 이른바 국학이니 한학이라 해서 가끔씩 신문이나 잡지에 논문 논설을 썼다. 이 사람들은 천만다행히도 해방이 되고서 친일 과거사 청산 바람을 용케도 피해갔고 또 개중엔 세상이 바뀌어 무슨 장차관이 되고서는 건국훈장을 챙기기도 했다. 왜? 열라 부자였으니 놀아도 됐으니깐. 기타 달랑 불알 두 쪽만 달고 나서 그 찢어지는 가난 면하겠다고 불나방처럼 뛰어든 일군이 있었으니 그리하여 용케도 성공했다 해서 면서기도 되고 일본군 장교까지 되고, 또.. 2023.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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