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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8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1748~1807), 〈속어를 고치다〔俗語改正〕〉 벌꿀보다 탁한 것이 없는데도 ‘청(淸)’이라 부르니 청탁(淸濁)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이미 죽은 꿩인데도 ‘생치(生雉)’라 하니 생사(生死)를 모르는 것이다. 전복이 애초 이지러진 데가 없는데도 ‘전복(全鰒)’이라 하니 군더더기 말이요, 기름과 꿀을 묻혀 튀긴 밀가루 반죽을 ‘약과(藥果)’라 하니 본디 약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일도 아니다. 꿀에 담근 과일을 ‘정과(正果)’라 하는데 그렇다면 꿀에 담그지 않은 것은 사과(邪果)인가? 문을 잠그는 자물쇠를 ‘쇠[金]’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인들 쇠가 아니겠는가. 불에 달군 낫도 ‘철(鐵)’이라 하고 말발굽에 박는 징도 ‘철’이라 하고 지남철도 ‘철’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인들 철이 아니겠는가. 밀랍으로 만든 초를 ‘황촉(黃燭)’이라 하는 것은 재질을 두.. 2022. 11. 24.
맹금, 그 종류와 이름〔鷙鳥名〕 우중에 저 먼 나무에서 꼼짝도 않고 앉은 매는 기품이 있다. 옛사람이 매과 새를 일컫는 이름은 다양하다. 제대로 암기하려고 했지만 항상 실패한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 수록된 〈맹금의 이름〔鷙鳥名〕〉을 보면 매과 새의 우리말 이름을 알 수 있다. “맹금은 종류가 매우 많다. 매 중에 그해에 태어나 길들인 것을 ‘보라매[甫羅鷹]’라고 하는데, 보라는 담홍색(淡紅色)의 우리말인즉 보라매가 깃털 색이 옅기 때문이다. 산에서 여러 해를 산 것을 ‘산지니[山陳]’라고 하고, 집에서 여러 해 기른 것을 ‘수지니[手陳]’라고 한다. 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털이 흰 것을 ‘송골(松鶻)’이라고 하고, 푸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고 한다. 수리 중에 몸집이 작.. 2022. 7. 22.
《한경지략漢京識畧》, 유득공-유본예 부자의 연결고리 인연이란 게 묘해서 얼마전엔 유득공柳得恭(1748~1807)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완역 출간되어 며칠만에 독파했거니와 그에서 군데군데 저 《한경지략漢京識畧》이 언급되어 가만 생각하니 저 역주본 역시 얼마 전에 도서출판 민속원에서 서울역사박물관 박현욱 부장 손을 거쳐 역주본이 출간되었으니 난중에 시간 날 적에 훑어 보리라 젖혀 두었던 것인데 기왕 이리된 거 내친 김에 이것도 보리라 해서 마침내 꺼내들고는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살폈으니 뭐 이런 지리지 보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그냥 훑으면 한두 시간이면 족하다. 저에서 무슨 거창한 내용을 뽑고 싶거덜랑 그런 자리는 찾아서 살피면 될 일이다. 둘을 이어주는 고리는 저 《한경지략》 저자 유본예柳本藝(1777∼18.. 2021. 1. 30.
유득공이 소개한 영길리국과 두목관 마알이니·시당동 영길리국[영咭唎國] 계축년(1793, 정조17) 연경에 사신으로 간 뇌자관賚咨官의 수본手本이다. "영길리국暎咭唎國(잉글랜드)은 광동의 남쪽 해외에 있는데, 건륭 28년(1763, 영조39)에 조공을 바치고 금년에 또 조공을 바쳤습니다. 두목관頭目官은 마알이니碼戞이呢와 시당동嘶噹㖦 두 사람인데 그 나라 국왕의 친척입니다. 일행이 모두 724명인데 그중 100명은 경사京師에 왔다가 이어 열하熱河로 갔고, 나머지는 천진부天津府에 머물렀습니다. 진공물進貢物은 19종으로서 제작이 기이하고 정교하여 서양 사람이 따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9월 초에 천진의 해로를 따라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상고해 보건대 이들은 곧 홍모이紅毛夷[털이 붉은 오랑캐-인용자]로서 왜倭가 길리시단吉利是段(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2021. 1. 24.
조선시대 삥땅의 요람 광흥창과 군자감[兩倉] 광흥창廣興倉은 서강西江에 있는데 백관百官의 봉록 지급을 담당하고, 군자감軍資監은 용산에 있는데 금군禁軍과 조례皁隷의 급료 지급을 관장한다. 이것이 양창兩倉이고, 다 호조戶曹에 속한다. 조운漕運으로 물자가 모이는 곳인지라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교활해서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양창에서 벼슬한 자는 필경 포흠逋欠을 했다거나 감독을 잘못했다거나 해서 처벌을 받는다. 나는 을사년(1785, 정조)에 군자감 판관判官이 되었고 몇 년 뒤 호조가 나를 조사했지만 문서를 후임자에게 이관한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다행히 무사했다. 경술년(1790)에 광흥창 주부主簿가 되고 계축년(1793) 가을에 호조가 또 나를 조사했는데, 앞뒤의 낭관郎官 10인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법에 따라 처벌되었지만 나는 재임한 넉 달 동.. 2021. 1. 24.
유득공이 증언하는 《열하일기熱河日記》 선풍과 그에 대한 꼰대 정조의 반응 열하일기熱河日記 상上(정조를 말함-인용자)이 요즈음의 문체가 비속하고 낮다 하여 여러 차례 윤음綸音을 내려 사신詞臣을 꾸짖고 패관 소설稗官小說을 엄금하였으며 또한 여러 검서관檢書官은 신기神技를 힘써 숭상하지 말라 신칙申飭하였다. 북청부사北靑府使 성대중成大中이 홀로 법도를 좇았기에 매양 그에게 포상을 더하였는데, 내각內閣에 명하여 술자리를 열어 시를 읊어서 그의 출발에 총영寵榮을 내렸다. 서영보徐榮輔·남공철南公轍 두 직각直閣과 강산薑山 이 승지李承旨(이서구李書九)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모두 당대 시문의 대가들이다. 검서관은 나와 이 무관李懋官(이덕무李德懋)이 참석하였으니, 지극한 영예라 이를 만하다. 이날 남南 직각은 성상의 뜻으로 편지를 써서 안의 현감安義縣監 박지원朴趾源에게 다음과 같이 유시諭示하였다... 20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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