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우물 물 구하기〔奪水〕
유득공柳得恭(1748~1807),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제6권
하양 현감 임희택任希澤이 말하였다.
“이인도 찰방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역의 건물인 취병루翠屛樓 앞의 큰 우물은 온 역의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인데 갑자기 물이 나오지 않자 역호驛戶들이 당황하여 이사를 가려 했습니다. 그때 어떤 손님이 와서 물 구하는 술수를 말하자 역민들이 일제히 하소연하면서 그 술수를 써 달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돈을 거두어 우물에 제사 지내고 나발 불고 북 치면서 우물을 돌고 한바탕 요란스럽게 한 뒤에 파하고는, 마침내 10리 정도 떨어진 옥천암玉泉庵 앞에서 개울물을 길어다 통에 담아서 수레에 수백 개를 실은 뒤 사람이 영차영차 하며 끌어다 마른 우물에 쏟아붓고 흩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가능한지 시험이나 해 볼 요량이었지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취병루에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내려다보니 넘실넘실 우물 물이 가득 차 있었고 급히 그 손님을 찾았으나 이미 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성명조차 알지 못합니다.”
진실로 이 술법을 얻는다면 가뭄을 대비하고 밭에 물을 댈 수 있으니, 용미거를 또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주-D001] 이인도 찰방利仁道察訪 : 이인도는 충청도 공주의 이인역利仁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를 말하고, 찰방은 그 역참을 관리하는 종6품 외직을 말한다.
[주-D002] 용미거龍尾車 :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해 나무로 만든 수차를 말한다. 용골거龍骨車라고도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20
任河陽希澤云:“爲利仁道察訪時,驛衙翠屛樓前大井,一驛之所賴,而忽然成眢,驛戶遑遑欲徙。有客來言奪水之術,驛民等齊籲,請試許之。醵錢祭井,吹螺擊鼓,繞帀喧轟而罷。遂往十許里玉泉庵前,汲澗水盛桶,載小車數百,人邪許引,至瀉于眢井而散。初意試可而已,未之信也。翌朝登翠屛樓,憑檻而視,滾滾盈井。急索客,已去矣。不知其姓名。”
誠得此術,則可以備旱,可以漑田,龍尾車又何足道哉!
ⓒ 한국고전번역원 | 2020
***
이 일화는 비록 허황함이 섞여 있기는 해도, 첫째 마을 공동체에서 우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징하거니와, 이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으며, 그런 까닭에 그런 우물이 말라버리자 온 동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려 했다는 기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아가 생물에 생로병사가 있듯이 우물 역시 그러해서 물을 잘 내던 멀쩡한 우물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말라버리기도 했으니, 그것을 살리고자 백방의 노력을 경주함을 본다.
우물은 마을 생명 그 자체였으며, 그런 까닭에 그 죽음은 그 마을의 죽음이었다.
우물의 죽음은 사람의 죽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어 각종 푸닥거리를 해야 했다.
저 수법 일종의 인공호흡인데, 내 어릴 적에도 마른 우물에서 시도하기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 풍납토성 경당지구 한성백제 우물과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에서 확인한 통일신라시대 우물은 둘 다 우물의 죽음과 연동한 우물 장송葬送 흔적이 농후하게 관찰되니 전자의 경우 230점인가 240점에 달하는 항아리류 토기로써 그 장중한 죽음을 장송했으며, 그 표징으로 그 꼬다디를 모조리 일부러 깨뜨린 이른바 훼기毁器에서 그 흔적을 명확하게 관찰한다.
이 훼기가 무엇인 줄도 모르는 고고학도가 천지빼까리라, 그것이 삶과 죽음의 표징이라 함은 이미 순자가 지적했으니, 그가 이르기를 이쪽과 저쪽이 다름을 표징하고자 일부러 그릇을 깨뜨려 무덤에 넣는다 했으니, 이런 명확한 기술이 있음에도 한국고고학사전에서는 "이유 불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기술이 발견된다.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놈들이 더 이상 옛날의 왜놈들이 아니다"는 유득공의 담대한 선언 (1) | 2022.12.31 |
---|---|
조선후기 유득공이 채록한 농기구 명칭 (0) | 2022.12.31 |
조선왕실의 독점적 지위를 확인한 한일합방조약 (1) | 2022.12.30 |
[유성환의 AllaboutEgypt]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11) 잔난자 사건 (0) | 2022.12.29 |
의궤에 속지 마라 (1) | 2022.12.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