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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6

동문선: 최치원 발해 인식의 양면성 흔히 최치원은 발해를 속말말갈의 후신으로 생각하여 고구려와는 별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謝不許北國居上表의 다음 구절이다. 臣謹按渤海之源流也, 句驪未滅之時, 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 寔繁有徒, 是名栗末小蕃. 甞逐句驪, 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 至武后臨朝之際, 自營州作孼而逃, 輒據荒丘, 始稱振國. 위 구절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최치원은 신당서, 구당서 중 신당서의 입장에 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최치원이 발해를 마냥 고구려와는 다른 말갈로만 보고 있었는가 따져 보면 동문선에는 이와 다른 취지의 최치원 글도 보인다. 동문선 47권: 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昔貞觀中。太宗文皇帝手詔示天下曰。今欲巡幸幽薊。問罪遼碣。盖爲勾麗獷俗。干紀亂常。遂振天誅。肅淸海徼。武功旣建。文德聿修。因許遠人。亦隨.. 2023. 8. 8.
시공간 개무시 최치원뎐 옛날 신라 때 최충이 새로 문창령에 제수되었는데 베게에 엎드리고 밥도 먹지 않으니 그 아내가 물어 말하기를, "이렇게 좋은 관직을 얻었는데 어찌 이에 이르도록 걱정하십니까?"라 하였다. 충이 말하기를, "내가 옛 이야기를 듣건대 문창령의 아내를 귀신이 빼앗아간 바가 몇십명이나 된다고 하오. 내가 이런 이유로 근심하는게요."라 하니... 고려의 해동공자 최충이 신라 최치원의 아버지로 나오는 것이나, 최치원의 시호 문창후를 살짝 비틀어 관직명으로 만든 건 그렇다치고, 하여간 재미는 있어보인다. 순한문에 구결을 단 것도 흥미롭고...국문학 쪽에서 좀 관심을 가질는지? *** Editor's Note *** 저에 대한 기호철 선생 평이 재미진다. "춘향이가 인당수에 다이빙 하니 이몽룡이 눈을 떴다는 말이군요" 2023. 4. 22.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만난 최치원 자주 이용한다 해서 혹은 책이나 논문 쓸 때 요긴하다 해서 서재 숙직실에 가까이 꽂아둔 책 일부다. 보다시피 난 잡탕이다. 여러 번 말했듯이 난 《안씨가훈顔氏家訓》을 혹닉한다 할 정도로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집구석에는 저 번역본으로 국내본 네 종류, 일본어 역본 1종류, 그리고 중국 본토에서 나온 주석본이나 교감본 여러 종을 구비했다. 저걸 붙잡고 있다 보니, 그에서 어딘가 익숙한 구절이 있어, 그가 바로 최치원임을 알고는 라는 논문 하나를 걸신 걸린 듯 쓴 일도 있다. 저에서 안지추는 후손들한테 어떤 기예 하나 잘 하는 일로 소문나지 마라고 가르친다. 글씨 잘 쓴다 소문 나면, 평생 남의 비문 써 주다 볼짱 다 본다 했다. 놀랍게도 최치원이 사산비명에서 저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 2023. 2. 9.
졸옹拙翁 최해崔瀣, 조상 최치원崔致遠을 평가하다 고운 최치원 하면 경주 최씨의 시조요, 나이 12세에 당에 들어가 빈공과에 급제해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어지러웠던 신라 하대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리저리 방랑하다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는 문학가요, 정치인이요, 경세가였다. 그 후예 중에 졸옹 최해崔瀣(1287-1340)라는 분이 있었다.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원나라 과거에 급제했고, 삼국시대부터 고려 후기에 이르는 문학선집인 을 엮은 사람이니 그 또한 고운의 피를 이었다 자부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고운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우리 집 문창공(文昌公 최치원)이 12세의 나이에 서쪽으로 가서 18세인 함통(咸通) 15년 과거에 올라 중산위(中山尉)를 지내고,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의 막(幕)을 보좌하였고, 벼슬이 .. 2021. 6. 23.
남의 비문에다 자기 울분을 토로한 최치원 "을사년(신라 헌강왕 11, 885)에 이르러, 나라 백성 중에 유도儒道를 중매쟁이로 삼아 황제 나라로 시집가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주하사柱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이름을 최치원崔致遠이라 하니, 唐 황제(희종·僖宗-인용자)의 조서詔書를 두 손에 받들었는가 하면, 회왕淮王(고변·高騈-인용자)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오니, 비록 이 영광 봉황이 날아다닌 일엔 부끄러우나, 학이 돌아온 일엔 자못 비길 만 하리라." 최치원은 지금의 경북 문경 봉암사에 남은 대당 신라 고 봉암산사교휘 지증대사 적조지탑 비명 병서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幷序 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마디로 나는 당나라 대국에서 가서 출세했다 이거다. 이런 그의 신라 귀환을 그 자신은 금의환향으로 보았다. 비록 그의 귀국.. 2020. 3. 10.
홍유후(弘儒侯) 유학의 큰 선비로 후작에 봉해진 인물이란 뜻인데, 고려시대에 최치원을 높여 추증한 이름이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설총 열전 : 우리 현종 재위 13년 천희(天禧) 5년 신유(1021)에 이르러 (설총은)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었다. 어느 사람은 말하기를 설총이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나 그런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설총(薛聰) 2018.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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