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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3

1941년 이후 조선과 만주의 정황 Editor's Note...박헌영은 "해방은 자다가 시루떡을 받는 것처럼 왔다"고 하고 함석헌은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했다. 해방을 논할 때 항용 저 말들을 끌어다대지만, 저 말이 역사해석에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심각성을 아는 이가 없다. 특히 과거사청산에는 더 그렇다. 저 말이 무슨 뜻인가? 저 시대는 누구나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신민이었다는 말이다. 실제 저 식민지시대 절대 다수 조선인은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대일본제국 신민이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의 일을 했다는 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오직 돌을 던져야 하는 대상은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하는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있을 뿐이다. 민족을 배반한 일은 죄가 아니며, 인간도리를 짓밟은 일이야말로 죄다. *.. 2023. 9. 17.
식민지 청년의 비애 흔히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는 말을 쓴다. 일제시대를 수식할 때 흔히 들어가는 말이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 말은 그럴 듯한데 구체적으로 뭐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실생활에서 와닿지 않는 이야기란 아무 소용도 없다. 식민지 청년의 비애라는것이 뭔가 하면, 결국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왜 이 이상 출세를 못하냐. 이게 식민지 청년의 비애다. 일제시대 조선인은 똑똑 한 사람일수록 민족 차별을 많이 느낄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병도를 봐라. 그는 한 나라의 역사학계를 이끌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해방 이전 그의 신분은 학사출신 시간강사였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망국을 가장 슬퍼했을 사람들은 누구일까? 농민?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농지개혁이 있기 점에는 농민의 생활수준, 경제수준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선.. 2023. 5. 5.
문화재 보호각으로부터 해방될 권리 야외에 있는 문화재는 보호각이 씌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닌 경우도 많다. 보호각 설립의 일반적인 지침은 아마도 문화재가 비, 바람 등 자연환경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도록 하면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일 거다. 이와 관련해서 기사를 찾아보니 이미 2006년도에 문화재 보호각의 여러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심포지엄이 있었다.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0611141708541 문화재 망치는 ‘애물’ 보호각 개선 안되나요 야외에 노출된 석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보호각들의 개선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 www.khan.co.kr 아마도 이 심포지엄 이후 서산 마애삼존..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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