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박헌영은 "해방은 자다가 시루떡을 받는 것처럼 왔다"고 하고 함석헌은 "해방은 도둑처럼 왔다"고 했다. 해방을 논할 때 항용 저 말들을 끌어다대지만, 저 말이 역사해석에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심각성을 아는 이가 없다. 특히 과거사청산에는 더 그렇다. 저 말이 무슨 뜻인가? 저 시대는 누구나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신민이었다는 말이다. 실제 저 식민지시대 절대 다수 조선인은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대일본제국 신민이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의 일을 했다는 데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오직 돌을 던져야 하는 대상은 인간으로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하는 짓거리를 일삼은 자들이 있을 뿐이다. 민족을 배반한 일은 죄가 아니며, 인간도리를 짓밟은 일이야말로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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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제시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일제 말에도 조선땅이나 만주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보는데,
이는 팩트에 입각하여 이야기 한다면
1941년 이후 독립운동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여
민족진영의 임시정부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충칭까지 밀려 있었고,
소위 김일성 부대가 속한 것으로 알려진 동북항일연군도 41년도 경 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이 시기에는 소련령으로 철수하여 소련군에 편입되어버린 상태였다.
이들은 대전 중 줄곧 소련령에 머물렀고 특히 해방에 임박해서는 하바로프스크 인근까지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한반도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도 임시정부 못지 않았다.
국내를 보면 소위 경성콤그룹 좌파 운동도 이 시기가 되면 박헌영도 지하로 잠적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던 판국이었다.
41년 이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와중에 그래도 연합국의 수뇌부에 가장 접근하여 전쟁돌아가는 판국을 읽어가던 사람들은 그래도
김구, 이승만 등 인사들이었고,
국내에 있던 여운형, 김성수, 박헌영 등은 전쟁이 어찌되고 있는지,
심지어는 카이로 선언도 제대로 전달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해방에 대한 술회에서
박헌영 정도 되는 좌익의 거두도,
"자다가 시루떡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정도로 40년대 초반, 대전기의 한반도와 만주 지역상황은 암울한 상황이었다 할 수 있고,
가끔 시대를 무시하고 만든 극에서는 40년대로 보이는데도 무장투쟁이 난무하는 장면-.
이런 부분은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좋았었겠지만, 사실과는 역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장면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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