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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격묘

이 땅의 도굴꾼들에게 고하는 통신(3) 다이너마이트는 필수 나는 일전에 일갈하기를 요즘 도굴꾼들에게 공부가 부족하며, 그리하여 혁혁한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도굴사 최악의 치욕들이 방방곡곡에서 빚어지고 있다고 했거니와, 그런 망신살이 조선시대 회곽묘灰槨墓 혹은 회격묘灰隔墓라는 무덤에도 미치고야 말았다. 2006.01.19 15:58:20서오릉 순창원 도굴 흔적 발견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사적 제198호) 경내 순창원順昌園서 전문도굴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도굴 미수 현장을 발견하고 현장조사를 실시했다고 19일 밝혔다. 순창원은 조선 13대 명종明宗의 원자元子 순회세자順懷世子(1551~1563)와 공회빈恭懷嬪 윤씨의 합장묘로, 문화재청에 따르면 18일 오전 발견당시 도굴범이 파낸 것으로 추정되는 봉분 뒤편이 다져..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10): 에필로그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약속한 대로 조선시대 회곽묘 관련 선행 연구를 소개한다. 아래 연구에 필자의 글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먼저 조선초기 상장의례의 변천은 정종수 선생의 중앙대 대학원 박사논문 "조선초기상장의례연구"에 자세하다. 이 논문은 회곽묘만 다룬 논문은 아니지만 조선 전기 주자가례를 도입하는 과정의 논란과 변천에 대해 서술하였다. 고려시대의 석실묘가 조선시대의 회곽묘로 변천해 가는 과정도 자세히 다루었다. 정종수 선생 다음으로 회곽묘의 변천과 관련하여 꼭 읽어봐야 할 책으로 김우림 선생의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를 권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 김우림 선생의 글은 회곽묘의 변천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글이었는데 이 책에 이전 주장이 알기 쉽게..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9)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조선시대 회곽묘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의 하나는 회곽묘 구조가 처음 조선 땅에 출현했을 때와 나중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백문화재연구원 방유리 선생의 "조선시대 회격묘 출토 유물의 수습과 보존" (야외고고학 제 7호)이나 김우림 선생의 단행본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 이야기" (민속원)을 보면 이 부분이 비교적 자세하다. 김우림 선생 주장에 따르면 조선전기에는 "국조오례의"에 기술된 방식대로 회곽묘를 만들었는데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소위 "국조오례의" 방식의 회곽묘 제작 기법. 방유리 선생의 논문에서 전재하였다. 초기 방식의 회곽묘 제작 방식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묘광을 파고 그 위에 목곽-..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7)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서 우리는 중국에서는 곤충, 나무뿌리나 도굴꾼 침범을 막고자 주자朱子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채택한 요장묘가 주자가례朱子家禮 형태로 한반도에 수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불교의식으로 점철한 고려시대 제반 장송葬送松 의례를 개혁하고자 하는 조선시대 신진사대부들이 일련의 개혁 일환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석실石室 대신 주자가례에 기록된 대로 회곽묘를 도입하고자 한 것도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제는 이렇게 도입한 회곽묘가 실제 조선 역사에서 어떻게 변천하고 발전하였는지를 살펴야겠다. 조선시대 회곽묘의 발굴상황 앞에서 이야기했 듯 조선 회곽묘는 그 원류라 할 중국에서 기술적인 도입한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가 기술한 내용을 지남指南으로 삼아 그..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4)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필자 주] 오늘 글에 있는 회곽묘 명칭에 관련해서는 사실 정리가 좀 필요한 상황인데 일단은 회곽묘로 통일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추후에 명칭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라가 자주 발견되는 조선시대 회곽묘는 이전부터 계속 존재하던 우리나라 매장 전통이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조선시대 들어와 모종의 이유로 우리사회에 "갑자기" 이식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회곽묘 비슷한 것이 우리나라에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 무덤이 나오기 전에는 그렇다면 어떤 무덤이 쓰였을까? 여러가지 형태의 무덤이 고려시대에도 뒤섞여 만들어 졌지만 그 중 지배계급이 즐겨 쓰던 무덤양식은 "석실묘"였다. 여주 상교리 ..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3)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각설하고. 여기서 오페르트의 이야기를 좀 더 보자. 오페르트의 도굴은 사실 자기들끼리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 천주교도와 신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 도굴과정에서도 현지인의 도구를 빌려 했다는 것을 보면 어떻게든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은 해야 했을테고 그 과정에서 조선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인즉-.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에 관여했다는 혐의가 있는 페롱신부.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보냈다는 글 안에 "남연군 묘를 도굴해 개항 시키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페롱신부의 평소 지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페롱신부는 군사작전으로는 조선을 개항시킬수 없고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
주자가례의 비극: 왜 우리 조상들은 미라가 되었나 (2)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우리나라 미라의 경우 다른 나라 미라와 구별되는 특이한 점은 인공적인 방부처리에 의해 만들어진 미라가 아닌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자연적인 환경에서 형성된 미라도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미라-. 라고 하지만 이렇게 아무런 인위적 처리 없이 미라가 만들어 지는 상황은 크게 보아 딱 두가지이다. 첫째는 아주 건조한 환경이다. 지구상에는 이런 극도의 건조한 환경하에서 박테리아가 제대로 번식할 조건도 충족하지 못하여 사람이 그대로 미라화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중국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에는 이처럼 보존상태가 완벽한 미라가 종종 발견된다. 이런 미라 존재는 일찌기 이 지역을 조사한 서구 탐사반에 의해서도 알려진 바 있어 사람들에게..
[조선시대 미라-7] 미라는 보존해야 하는가 매장해야 하는가 (2) 신동훈 (申東勳·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앞 2회 분 연재에서 한 번은 미라 보존과 매장의 문제를, 또 다른 한번에서는 그간 우리 연구실에서 보고한 연구 실적을 간단히 언급했다. 이 중 두번째 분량은 본문에서도 썼던 바와 같이, 조선시대 미라가 단순히 흥미 영역을 넘어 명실상부 한 과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조선시대 미라 안에 아직도 잔존한 과학 정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윤리적인 문제만 해결된다면 조사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증명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과연 어떤 "의학적 정보"가 미라 연구를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인지 그 이야기를 하나 예를 들어 써보겠다. 때는 지금부터 13년 전. 2006년 4월. 지금은 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