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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다 료사쿠3

에마키[繪卷]가 포착한 하마다 고사쿠와 후지다 료사쿠 일본 근대 고고학 1세대로, 1921년 경주 금관총을 발굴해 우리에게도 유명한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1881-1938)가 1924년 조선 땅을 다시 다녀간다. 그때 그와 함께 다녔던 화가 오타 키지로(1883-1951)가 하마다의 행적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 그림 두루마리(에마키)로 만들었다. 그걸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41년에 사진으로 찍어갔다. 그 마지막 장면인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후지타 료사쿠(1892-1960)가 하마다에게 이렇게 권했던 모양이다. "센세이! 벚꽃 보러 안 가시렵니까?" 근데 뭐가 뜻대로 안되었는지, "밤벚꽃놀이 결의안"이 철회되고 만다. 이에 후지타군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가로등 아래 벚꽃이 흩날리는데, 손을 뻗어 그 잔영을 잡아보려는 이가 아마.. 2021. 6. 26.
원효의 혼이 서린 경주 고선사, 그리고 새롭게 드러난 그 석탑의 수리 내력 경주 고선사지에서 찾은 얇은 부식 함석판 정체는송고시간 | 2020-01-05 06:20임재완 경주박물관 연구사 분석 "1943년 중수 공사 기록""3층 몸돌 사리구멍서 발견됐을 가능성" 국립경주박물관 사무동 전면 마당에 선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이다. 지금은 덕동댐 건설로 수몰된 고선사高仙寺라는 통일신라시대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75년 이곳으로 이전 복원했다. 이 고선사라는 절은 한국사에서는 원효와 관련 깊은 절이라 해서 유명하다. 저 사진 석탑 앞쪽을 보면 비석을 꽂아 세운 받침돌 거북이돌을 보는데, 저것이 바로 같은 고선사 터에 있던 것으로, 원효대사 손자 설중업이 할아버지 행적을 기려 새겨 세운 서당화상비誓幢和尙牌를 박은 설비다. 요롷게 생겼다. 좀 더 자세히 보면 다음과 같다. 보다시피 거북.. 2020. 1. 5.
산림파괴가 도굴의 지름길 이 사진이 아마도 1938년 4월,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부여 능산리陵産里 동고분군東古墳群을 발굴조사할 무렵에 촬영한 이 일대 유리건판일 것이다. 무엇이 도굴을 유발했는가? 그 해답의 일단을 본다. 산림파괴가 핵심이다. 산림파괴는 산을 사막으로 만든다. 그에 따라 지표가 깎인 데서 무덤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1971년까지도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기적이라 불러야 한다. 이런 상황이 지금의 북한 개성이다. 북한은 산림 황폐화 수준이라 산에서는 고려시대 무덤들이 저딴 식으로 노출됐으니, 도굴이 아니될 수가 없다. 박정희시대 산림녹화 사업 여파로 온 반도가 밀림으로 변한 지금.... 얼마나 도굴이 힘들어졌는지 한번 생각해 봐라. 여름철이면 무덤은 흔적도 찾기 힘들다. 이 사진 역시 당시 능.. 2019.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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