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역사학자로서의 남당 박창화] 《중앙사단》 논문의 경우

by taeshik.kim 2020. 10. 21.
반응형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를 내가 도서출판 김영사를 통해 공간하기는 2002년 5월이다.

직후 절친한 형 박환무가 연락이 왔다. 일본 근대 천황제를 주된 연구분야로 삼는 서강대 사학과 출신으로, 일본 유학파다.

그의 이야기인즉, 박창화가 논문을 공간한 것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진즉에 박창화를 역사학자로 보았으니,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그는 그 시대 전형의 역사학자였다.

 

 



나아가 《화랑세기》가 공개되면서 알려진 그의 유작들에는 분명히 강역과 관련된 논문도 있었고, 더불어 무엇보다 《요사遼史》지리지를 필사하기도 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에서 그가 학술지에 공간한 논문까지 있다니, 역사학도로서의 박창화는 이제 기정사실화하는 단계에 접어든 셈이었다.

박환무에 의하면, 초기 신라사 개척자 중 한명인 말송보화末松保和가 정리한 신라사 논저 목록집에 문제의 박창화 논문 3편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가 메모한 서지사항에 의하면, 박창화는 《중앙사단中央史壇》이라는 일제시대 역사학 잡지 1927년 12월호와 28년 2월호에 각각 ‘신라사에 대하여[新羅史につい]’라는 제목의 미완성 논문을 투고했다.

 

박창화 '신라사에 대하여' 



한데 박환무 역시 그렇게 지적했지만, 나 역시도 말송보화가 소개한 그의 논문이 여직 한 번도 인용조차 되지 않은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서지사항을 확인했으니, 실제 그의 글을 확인하는 순서가 남았다.

한데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일반 도서관에는 도무지 《중앙사단》이라는 잡지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검색에 용케도 국립중앙도서관에 그 전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귀중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것도 놀랍게도 전질을 갖춘 상태였다.

나중에 조사 결과 드러났지만, 이 잡지는 1920년 5월에 창간해 1928년 6월에 10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한 역사 전문 월간지였다.

또 실제 이 전질을 전부 내가 조사하면서 드러난 것이지만, 그 전질은 개별 잡지 전질이 아니라, 그것을 몇 호씩 한 책씩으로 묶은 전질 형태였다.

 

박창화와 그의 강역 관련 논고



그 전질은 식민지시대 발간물이라 해서ㅈ귀중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나에게 더욱 다행인 점은 당시 나는 국립중앙도서관 담당 기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도서관 담당 기자였다.

그런 생활 중에서 나는 특히 귀중본실에 관심을 기울였으니, 이쪽에는 아는 분이 많았고, 그런 까닭에 내 부탁은 웬만하면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중앙사단》 전질을 열람하고 싶다는 연락을 지금은 퇴임한 이귀원 당시 고전운영실장께 했다. 이 양반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겠지만, 까다롭기 짝이 없는 분이다. 그런 분이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평소에 고전운영실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도서관 귀중본실은 7층에 있었다고 기억한다.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이 되어 도착하니, 조금 안 있어 《중앙사단》 잡지 전질이 도서관에서는 북트럭이라 부르는 그 책 나르는 카트로 이내 도착했다.

지하 문서고에 있던 것을 꺼내왔다 했다. (이후 계속)

(2017. 10. 21)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