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934

접어 포개서 시신 얼굴가리개로 쓴 신라금동관 6세기 초반에 만들었다 추정하는 신라 적석목곽분인 경주 황남동 120-2호분은 발굴 결과 금동관을 접어서 시신 얼굴가리개로 쓴 것으로 드러났다. 저 금동관이 얼굴을 거의 온전히 가린 것은 분명하되 그렇다면 저걸 머리를 아예 다 덮어씌운 것인지 아니면 절반을 포개서 수건처럼 얼굴에 댄 것인지가 궁금해 조사단에 직접 확인한 결과 후자임이 확실하니 그것 관이 접힌 부분이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이라 한다. 얼굴 부분만 떼서 보면 이렇다. 앞선 관련 글에서 내가 잠깐 말했듯이 이 전통이 같은 경상도 문화권에서 시대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부채를 저런 용도로 쓰기도 함을 본다, 부채로 저런 식으로 시신 얼굴을 가리는데 지금으로부터 대략 이천년전, 그러니깐 저보단 대략 오백년 정도 빠른 서력기원 전후 이른바 통나무 목관.. 2020. 9. 4.
발명한 김정희와 박제가 《용재수필》 물린 자리 허전함을 메꾸고자 새벽에 뒷다리 잡기 시작한 후지츠카 책 역본이다. 원저 명성이야 익히 알려진 바이거나와 우리가 아는 추사 김정희는 '발명'되었다. 다시 말해 추사는 자연히 주어진 그 무엇이 아니요 누군가가 필요에 의해 주물한 이미지다. 그 위대한 주물의 용범을 만든 이가 후지츠카요 그가 주물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후지츠카를 제대로 소화한 적이 없다. 저 일본어 원전은 무단 복제본으로 오래전에 구해 놓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지츠카가 더욱 놀라운 점은 박제가 역시 저의 손끝에서 관속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본인 후지츠카에게 김정희나 박제가가 종착역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한 바는 청대 고증학의 일본 열도 상륙의 양상이었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2020. 9. 4.
김유신의 두 마누라와 네 딸, 그리고 조카 김유신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정실 자식으로는 태종무열왕 딸인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5남4녀를 두었다. 아들로는 삼광과 원술 등이 모두 대아찬 이상 등위의 재상을 지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하거니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 후광이었다. 문제는 저 기술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세한 근거 제시는 생략하지만 저 아들 중에서 행적을 분석하면 맏아들 삼광은 결코 지소부인 소생일 수는 없다. 김유신은 655년 지소와 혼인했는데, 당시 지소는 스무살도 안된 애송이고, 반면 삼광은 그 지소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았다. 더구나 김유신이 지소를 맞아들일 때 나이가 이미 61세라, 이때까지 미혼으로 지냈다고 보긴 힘들다. 고자도 아닌데 말이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 관련 기술을 종합한 김유신 혼인 관계도와 .. 2020. 9. 3.
[복수에 불타는 팔순 왕] (2) 고구려왕을 효수했다는 주장 표문은 요컨대 우리랑 힘을 합쳐 고구려를 치자는 내용이다. 당신들이 고구려 서쪽을 치면 남쪽에서 우리가 쳐서 고구려를 협공하잔 것이다. 당시 백제와 개로왕이 완전한 고구려 타멸, 곧 멸망을 생각했는지 아니면 본떼보여주긴지는 알 순 없지만 군사동맹을 제안한 것이다. 이 표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만 우리 조상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에서 말하는 쇠釗가 바로 100년 전에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은 고.. 2020. 9. 2.
[복수에 불타는 팔순 왕] (1)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 동아시아 역대 제왕으로 조선 영조 이금李昑(1694~1776)이 향년 83세로 장수했다고 하지만,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와 고구려 장수왕에 견주면 번데기 앞에서 잡은 주름에 지나지 않는다. 조타는 정확한 나이를 알 수는 없지만, 백수 어간을 누렸음이 확실하다. 조타의 경우 기원전 207년에 즉위해 기원전 137에 죽었으니, 왕위에 있은 기간만 70년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비 발견으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그 차이는 1년에 지나지 않으니 대세에 지장이 없거니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412년 음력 10월에 즉위하여 재위 79년 만인 491년 겨울 12월에 훙薨하니 향년 97세라 장수왕이라 시호했다고 할 정도다. 장수는 본명이 거련巨連인데, 중국 사서에서는 련璉이라는 한 글자로 등장한다. 그를 일러 몸과.. 2020. 9. 2.
신라가 세운 문주, 부용국으로 전락한 백제 백제는 두 번 멸망했으니 1차 멸망은 475년에 있었다. 이때 백제는 왕도를 한성漢城에 두고 있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 시점 이전까지 대략 500년 백제를 떼어내 한성백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이들을 멸망으로 이끈 이는 고구려였으며, 당시 왕은 장수였다. 광개토왕 담덕 아들인 장수왕은 재위한지 이미 63년이 되는 해에 3만 대군을 일으켜 백제 왕도로 진격했으니, 그가 왕위에 즉위한 때가 대략 18세 무렵이니, 이때 이미 팔순 상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백제를 철천지원수로 여겼던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다. 것도 겨울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말이다. 이 사건이 정작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그의 재위년도에는 다음과 같이 아주 간략하게 적혔거니와 9월에 왕이 병력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 2020. 9. 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