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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思道) 신라 제24대 진흥왕 정비다. 삼국사기에는 '思道(사도)'라고 표기한 반면 삼국유사에는 '思刀'라고 적었지만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흥왕과의 사이에 아들로 동륜(銅輪)·금륜(金輪)·구륜(仇輪)을 낳았고 딸로는 태양(太陽)·아양(阿陽) 등을 낳았다. 삼국사기는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즉위년 : 진흥왕(眞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이다 그때 나이 일곱 살이었다. 법흥왕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서 법흥왕 딸이며,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王太后)가 섭정했다.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지왕 :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이고 진흥왕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2018. 3. 13.
구륜(仇輪) 신라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이다. 동륜(銅輪)과 금륜(金輪·훗날의 진지왕) 동생이면서, 21세 풍월주를 역임하는 선품(善品)의 아버지다. 진평왕시대 무렵에 화랑에도 깊이 관여했다. 화랑세기 미생공 전 : 그때에 낭도들간에는 아직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統合元流)라 불렀다. 임종·대세·수일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文弩派)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신통(大元神統)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일파(美室一派)인데 하종·구륜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다. 화랑세기 선품공 전 : 21세 선품공(善品公)은 구륜공(仇輪公) 아들이다.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제2 후백제(後百濟).. 2018. 3. 13.
봉상왕(烽上王) 고구려 제14대 왕이며 생년을 알 수 없고, 재위기간은 292∼300년이다.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臿矢婁)라 한다. 서천왕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왕위를 이었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는데서도 아랑곳없이 대규모 공사를 강행하다가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에게 쫓겨나 자살했다. 봉산원(烽山原)에 묻힌 까닭에 시호가 봉상이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봉상왕 조 : 봉상왕(烽上王)은 이름이 상부(相夫)이며 서천왕의 태자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23년에 죽자 태자가 즉위했다.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 형제[諸父]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2018. 3. 13.
창조리(倉助利) 고구려 봉상왕~미천왕 시대 국상이다. 남부 대사자 출신으로, 봉상왕에 의해 국상으로 발탁됐다. 모용씨 침입에 고구려가 시달리자 고노자를 발탁해 막았으며, 봉상왕 말년에는 잇단 재해에도 왕이 대규모 공사를 일으키자 간했자다 말을 듣지 않자, 다른 사람들과 모의해 왕을 몰아내 자살케 하고 을불, 곧 미천왕을 맞아들여 정국을 안정시켰다. 삼국사기 권 제49(열전 제9) 창조리 전 : 창조리(倉助利)는 고구려 사람이다. 봉상왕(烽上王) 때 국상(國相)이 되었는데 그때 모용외(慕容)는 변경의 걱정거리였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모용씨의 군사가 강하여 여러 차례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니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의 대형(大兄) 고노자(高奴子)는 어질고도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침략을 .. 2018. 3. 13.
서천(西川)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벌어진 백제와의 대야성 전투 당시 도독 품석의 보좌관으로, 신라 쪽 정세가 불리해지자 백제 장군 윤충과 백제에 항복하자고 품석을 설득했다. 하지만 백제가 배신하는 바람에 항복하는 길에 백제군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관위는 아찬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죽죽 전 : 죽죽(竹竹)은 대야주 사람이다. 아버지 학열(郝熱)은 찬간(撰干)이 되었다. 죽죽은 선덕왕 때 사지(舍知)가 되어 대야성도독 김품석(金品釋) 휘하에서 보좌역을 맡고 있었다. 왕 11년 임인(백제 의자왕 2·642)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했다. 이보다 앞서 도독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 이를 빼앗았으므로 .. 2018. 3. 13.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고구려를 침략한 수나라 백만 대군을 살수에서 몰살함으로써 대승을 이끈 고구려 대신이다. 기타 그의 가문 내력과 행적을 알 수는 없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을지문덕 열전 :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의 선대의 계보를 알 수 없다. 자질이 침착하고 날쌔며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겸하여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右翊衛) 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와서 아홉 개의 군부대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을지]문덕(文德)이 왕명을 받아 그 진영에 나가 거짓 항복하니, 사실은 그 허실을 엿보기 위함.. 2018.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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