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를 심사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국과는 시차가 상당한 지구 반대편에서 개최될 때는 그에 따라 기자들이 치르는 곤욕이 적지 않다.
등재 심사는 예정된 순서를 대체로 따르기는 하지만, 현지 사정에 따라 뒤집어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개별 건 심사마다 정해진 시간이 따로 없어 논의가 한없이 길어지기도 한다.
통신이야 어차피 나오는 대로 쓰면 되니깐 문제가 덜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은 이런 때가 가장 곤혹스럽다.
등재에 대비해서 면을 비워놓거나, 미리 관련 뉴스를 제작해 놓았다가 여차하면 쏴 버려야 하지만,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루를 꼬박 날리는 일도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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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현직 기자로는 마지막 공무 출장이요, 일선 기자로는 마지막 현장 취재였던 2015년 여름 독일 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그러했다.
이해 6월 말에 개막해 다음 달 초까지 이곳 월드 콘퍼런스 센터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오죽이나 시끄러웠던가?
그 분란은 일본이 만들었다.
일본이 등재 신청한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군은 강제 징용의 현장이 상당수인 데도 일본이 그런 사실을 등재 신청서에서 몽땅 누락했다 해서
특히나 그 주된 피해국인 한국은 등재 자체를 무산시키려 했으니 말이다.
이 회의에서는 이것 말고도 한국으로서는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등재했다는 점에서 다른 의의가 있었다.
현지 시각 7월 4일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등재가 확정됐다.
이미 그 이전에 유네스코 자문기구로 세계유산 중에서도 문화유산 사전 심사를 담당한 이코모스(ICOMOS)가 등재 권고를 한 마당이라 등재는 확실시되었다.
문제는 일본 건이었다.
통상 세계유산 등재 심사는 영문 표기 국가 순서로 이뤄진다.
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Afganistan)이라든가 알바니아(Albania), 혹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같은 데서 신청한 유산은 가장 먼저 심사가 진행된다.
이에 따른다면 일본(Japan)이 등재 신청한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군은 한국(Korea)의 백제역사유적지구보다 먼저 심사를 했어야 했다.
이코모스에서는 이 역시 이미 등재 권고를 했으므로, 관례에 따른다면 위원국들이 축하 메시지를 전하고 의장이 나무망치 빵빵 내려치는 일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마침 세계유산위원회 21개 위원국 중 하나인 한국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으니, 그 결정권을 쥔 다른 위원국들도 양국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당시 위원국인 일본이 제아무리 경제력을 앞세워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세다 해도 한국 역시 이제는 무시 못 할 존재로 부각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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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이 문제는 막판까지 의장국인 독일의 주재로 한일 양국은 물론이려니와
다른 위원국들이 협상 혹은 중재에 나서는 바람에 진통을 겪게 되지만 도무지 타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이 문제는 결국 당초 예정한 4일에 등재 심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이튿날로 넘기고 말았다.
그 결과를 노심초사하게 기다리던 현지의 나는 물론이려니와 본국의 문화재 담당 기자들과 외교부 담당 기자들도 이런 소식에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나로선 더 곤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애초 이 회의 취재를 위한 출장이 7월 5일로 끝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라면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군 등재 여부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못 본 채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실제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6월 29일 시작한 이번 출장을 떠나기 직전인 6월 26일은 금요일이었다.
이날 저녁 6시가 조금 넘어 회사에서 막 퇴근하려던 길이었는데, 문화부장 ○○○가 나를 불러 세웠다.
그 의미를 내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회사 내부에서 시시각각 나를 향해 조여 오기 시작한 흐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인즉슨, 내가 7월 1일자로 전국부로 발령 난다 했다.
그러면서 독일 출장을 그대로 보내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는 문화부에서 임시로 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키지 않는 출장을 왔던 것이다.
누가 봐도 영전이 아닌 징벌성 징계 인사가 난 마당에 무슨 일인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이꼴 저꼴 안보고 내일 귀국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속이야 편했다.
하지만 예정대로 내일 귀국하겠다는 말에 본국의 부장이 난색을 표하고 나섰다.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일은 끝까지 처리하고 와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말이야 그럴 듯하다.
그러면서 회사랑 얘기해 보겠다고 했다.
그랬다가 얼마 안 있어 출장을 하루 연장하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깨끗이 정리가 되었느냐 하면 여러 문제가 또 도사리고 있었다.
이 출장은 회사 경비로 온 것이 아니라 외부 지원이었다.
명목은 유네스코 한국위위원회(이하 한위) 초청이었다.
실제로도 그쪽에서 돈을 다 댔다.
한데 회사에서는 출장 연장에 따른 경비는 자체 부담할 생각은 전연 없이 그쪽과 얘기를 잘 해 보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초청 기관인 한위에 빌든지 아니면 협박하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앞서 우리 언론은 거지라는 말을 한 까닭이 이에서도 해당한다. 할 수 없었다.
이런 사정을 한위에 얘기했더니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
무엇보다 예산이 턱없이 모자라 그러기는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호텔도 체크아웃해서 옮겨야 하고, 비행기 표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회사, 그리고 한위와 이런 옥신각신이 오가는 사이, 나는 또 나대로 우리 외교부 측에는 양해를 구했다.
이렇게 되어 내일 귀국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번 출장은 실은 문화재청과는 관계가 없었다.
초청 기관이 한위였고, 그에서 제반 경비를 부담했지만, 이번 출장을 실제로 가능케 한 기관은 외교부였다.
외교부가 한위에 말해서(실제는 떠넘기기일 수도 있다) 한위가 나를 초청하는 형식으로 독일 현지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니 나로선 한편으로는 외교부 초청이었던 셈이니, 당연히 그쪽에다가 사정은 설명하는 것이 예의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데 이렇게 되자 외교부에서 펄쩍 뛰었다.
무엇 때문에 출장을 왔는데 그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가냐는 것이었다. 저 일본 기자들이 안 보이냐는 말도 했다.
나로서는 실로 난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고 있었다.
나랑 별개로 오기는 했지만 이튿날 같은 비행기로 떠날 문화재청 대표단과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도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각종 국제통화로 정신이 없었다.
이 자리에는 나선화 문화재청장을 문화재청 국제교류과 사무관 유재걸과 대변인실 사무관 이철규가 수행 중이었다.
사정을 뒤늦게 파악한 나 청장이 그러면 문화재청이 지원하면 안 되느냐는 말을 꺼냈다.
좀 곡절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곤란하다던 문화재청이 나중에는 대기로 했다는 말을 유재걸에게 전해 들었다.
자기네도 가뜩이나 없는 예산에서 쥐어 짜내고자 했던 것이다.
한데 비교적 최근에야 나는 이 사태 다른 전말을 알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청이 하루 늘어난 내 체재비를 대기로 한 것이 아니라 실은 나 청장이 개인 돈을 부담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 청장은 이런 사실을 나한테는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문화재청이 처리한 것처럼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어떻든 사태는 겨우 정리됐다.
한위에 없는 예산 쥐어 짜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문화재청에 신세를 질 수는 더 없으니, 고민 끝에 내가 나에게 할당된 비행기 표를 반납하기로 한 것이다.
한데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뭐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티켓 중에서도 환불도, 승급도 아니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도 곤란하다는 답변이 한위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한위는 티켓을 끊은 여행사와는 거래가 많을 테니 아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나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내가 비행기 티켓을 반납한 돈으로 하루 호텔 숙식비를 해결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귀국길에 올랐던가? 내 돈으로 끊어서 이튿날 귀국했다.
나는 대략 20년 전부터 오른발 저림이 심하다.
그래서 비행기 타는 일이 곤욕이다. 몇 시간 이상을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저림이 심각한 병증이다.
내가 요즘 들어와서 웬만하면 비즈니스 석을 이용하는 까닭은 이런 신체 결함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독일에 갈 때도 이코노미로 배당된 좌석에서 내 돈을 보태어 비즈니스로 갔다.
김태식 개인에 대한 당시 회사 측의 반감도 단단히 한 몫 했겠지만, 회사가 하는 매사가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거지도 아닌데 말이다.
이 글을 초하는 지금 새삼 그때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2016.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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