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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람들은 관왕關王[관우關羽]을 존경하여 국가에서 사당을 세우는 외에 집집마다 화상을 그려 놓고 생활하거나 음식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특히 전쟁에 출동할 적에는 더욱 정성을 드린다.
무술년 봄과 여름 사이에 명 나라 군사가 많이 왔을 때, 남대문 밖 도제고현都祭庫峴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웠는데, 대소의 장수들이 예를 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심지어는 성상께 예를 드리도록 청하기까지 하였다.
기해년 전쟁이 끝나 군사가 돌아갈 적에, 성지聖旨[중국 천자의 분부]를 받들었다 하고, 동대문 밖에 사당을 세우는데 관원 한 사람을 두어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비록 중국에서 지급한다고 하지만, 그 액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공사가 커서 모두 우리 나라에서 재력을 동원하게 되니, 그 수는 만 냥도 넘었다. 공사가 끝난 다음에는 국가에서 관리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도제고에는 소상塑像을 세웠고, 동대문 밖에는 동상銅像을 세웠다.
관왕이 비록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장수라고는 하나, 남의 손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고, 공이 후세에 끼쳐진 사람도 아닌데, 중국에서 이처럼 존경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고황제高皇帝[명 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때에 신병神兵을 내어 도왔다.’ 하나, 알 수 없다.
그 자신 임진왜란 세대로 충청도관찰사, 병조참판,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 손가는 대로 쓴 갑진만록甲辰漫錄에 보이는 대목이다.
지금도 서울 동대문 밖에 남은 동관왕묘가 바로 그가 말하는 그 관왕묘 중 하나인데, 남대문 밖에 세운 것은 일찍이 망실됐다.
저 관왕묘가 임진왜란 참전 용사들을 통해 중국에서 직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새삼하지는 아니하나,
문화가 무엇을 계기로 어떤 방식으로 이식하느냐를 생각할 적에 계속 곱씨어야 하는 증언이다.
중국에선 인기 절정인 관우가 왜 조선에선 시들했을까 그 일단도 저에서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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