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가족끼리 혼인, 묘지명엔 글자 숫자 밝혀

최근 서북대학西北大学 문화유산학원과 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원西安市文物保护考古研究院이 공동으로 《섬서성 서안패교 국면오창 당묘 발굴 간보 陕西西安灞桥国棉五厂唐墓发掘简报 》를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이 발굴 프로젝트는 2020년부터 방직서가纺织西街 구역에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해 지금까지 한당汉唐 및 명청 시기 무덤 41기를 정리했다.
개중 중만당中晚唐 무덤 3기 중 2기에서 묘지墓志가 출토되었으며, 묘주墓主는 당나라 군관 전비田伾와 그의 부인 풍씨冯氏로 두 사람 모두 무관 가문 출신이다.
이번에 발견된 3기 중만당 무덤은 모두 수혈묘도竖穴墓道 토동묘土洞墓다.
묘지墓志, 탑식 항아리[塔式罐], 도용陶俑, 삼채 포당 사자[彩抱幢狮子], 동촉铜镞, 동전 등 총 28점(세트)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주목할 점은 정교하게 제작된 독특한 모양의 삼채 포당 사자가 전체적으로 녹색, 노란색, 갈색 유약을 발랐으며, 유약 색상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현재 서안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당삼채는 주로 일용 기구와 모형 기구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이전에 발견된 삼색 사자 모형은 대부분 쪼그려 앉아 있거나 머리를 높이 들고 발톱을 핥고 있으며, 경당을 안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사자 이미지는 사자와 불교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입증하며, 당대 불교 문화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무덤에서 출토된 두 개 묘지는 모두 청석青石이다.
하나는 전비田伾伾의 묘지이고 다른 하나는 풍씨의 묘지다.
전비 묘지는 사각형 덮개에 盝 지붕[gable roof]이 있다.
덮개 상단에는 '대당고전부군 묘지명大唐故田府君墓志铭'이라는 해서가 음각되어 있다.
지석은 사각형으로, 사방이 약간 파손되었으며 해서체 총 351자를 새겼다.
풍씨 묘지는 지석만 남아 있으며, 네모나고 사방이 약간 파손되어 있다. 지문은 해서체로 총 625자다.
전비 묘지에 따르면 그는 무관 가문이며 중간 무관에 속한다.
풍씨는 그의 부인이며 그녀의 아버지는 분주汾州의 장군이자 역시 무관 가문이다.
전씨 부부 묘지는 당대 가족 내부의 적서 자녀 생활 상태를 드러내는 독특한 시각을 제공한다.

묘지 글에 따르면 이 부부는 4남 3녀를 두었으며 자녀의 관직과 결혼에 대한 정보가 명시되어 있다.
조사팀은 풍씨 자녀를 제외하고 전비의 관직을 맡지 않은 두 서자가 풍씨 묘지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어느 정도 당대 가족 생활에서 적서가 다른 사회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풍씨 묘지는 작성자를 "조의랑 전 태부사승 상주국 이술 찬 朝议郎前太府寺丞上柱国李述撰"라 하고,
그 글씨를 쓴 이는 풍씨의 아들 전문아田文雅라고 밝혔으며,
묘지 뒤에다가 "범륙백이십오자, 사자 문아 서 凡六百廿五字,嗣子文雅书"라고 밝혔다. 이는 당대 묘지에서는 비교적 보기 드문 형식이다.
서안시 문물보호고고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고고학 발굴이 관중 지역 중만당 무덤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했다고 소개했다.
출토 묘지는 당대 기층 장교 가문의 생활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당대 중후기 중앙과 지방 번진藩镇의 정치 구도와 번진 막부藩镇幕府의 요좌僚佐 제도의 번영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이건 보고서 원문을 구해봐야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겠다.
무엇보다 문서 정확한 작성 시점이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묘지명에서 글자 숫자를 밝히는 전통은 말할 것도 없어 법률 문서에서 오는 전통이다.
법률 조항은 한 글자도 덧보태거나 뺄 수 없다. [이는 봉평 신라비에서도 보이니, 비문은 전체 398자라고 아예 못을 박았다.]
이런 문서 작성 전통을 그대로 무덤에다 가져간 이유가 버릇 때문인지, 아니면 저 묘지문이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신들과 묘지 구입 매매에 대한 법률 문서의 일종으로 간주한 결과인지는 현 단계서는 파악할 수 없다.)
Recently, the School of Cultural Heritage of Northwest University and the Xi'an Institute of Cultural Relics Protection and Archaeology jointly released the "Brief Report on the Excavation of Tang Tombs at the Fifth National Cotton Mill in Baqiao, Xi'an, Shaanxi". The project began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Textile West Street area in 2020, and has so far cleared 41 tombs from the Han, Tang, Ming and Qing dynasties. Among them, 28 pieces (sets) of burial objects were unearthed from three tombs of the middle and late Tang Dynasty, including epitaphs, tower-shaped jars and tri-color lions holding pagodas. Previously, the tri-color lion models in the Xi'an area did not have the shape of holding a pagoda. The image of the lion holding a pagoda discovered this time further confirms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lions and Buddhism, which is of great value to the study of Buddhist culture in the Tang Dynasty; the two bluestone epitaphs provide a new perspective for revealing the internal living conditions of the Tang Dynasty family and the family life of grassroots officers.
近日,西北大学文化遗产学院与西安市文物保护考古研究院联合发布《陕西西安灞桥国棉五厂唐墓发掘简报》。项目于 2020 年起在纺织西街区域开展考古发掘,迄今共清理汉唐及明清时期墓葬 41 座。其中 3 座中晚唐墓出土随葬品 28 件(组),包括墓志、塔式罐及三彩抱幢狮等。此前西安地区三彩狮模型未见抱持经幢造型,此次发现的抱幢狮形象进一步印证狮子与佛教的密切关联,对研究唐代佛教文化具有重要价值;两块青石墓志则为揭示唐代家族内部生活状态及基层军官家族生活提供了新视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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冯氏墓(M15)墓室平面呈梯形,拱顶土洞。墓室长2.6、宽1.58~1.9、高1.44米。随葬品主要置于墓室东南部和棺侧,器类包括塔式罐、青釉双系罐、白瓷盂、铜镜、铜钱、铅器、铁剪及墓志等。木棺位于墓室西侧,保存较差,仅存朽痕。棺长2.05、南宽0.5、北宽0.62米。人骨已朽成粉末,仅残存少量头骨残块,葬式不详。
田伾墓(M17)墓室平面呈圆角方形,拱顶土洞。墓室进深3.1~3.8、宽1.66~2.3、高1.5米。墓室西侧有一生土棺床,长3、宽约0.8~0.85、高0.2米。随葬品均置于墓室东南部,出土器物包括陶罐、塔式罐、陶俑、陶动物、陶砚及墓志等。木棺置于墓室西侧棺床上,保存较差,平面呈梯形,仅剩朽痕。棺长2.23、南宽0.5、北宽0.65米。墓葬被扰乱,仅存头骨置于棺床东侧,葬式不详。
M19墓室西北部被现代扰坑打破。进深2.6~2.7、宽1.45~2.2、高1.3米。随葬品主要置于墓室东南部,有塔式罐、陶俑、三彩抱幢狮子、铜镞和铜钱。墓室遭盗扰,未见葬具和人骨。
三座墓葬共出土随葬品28件(组),有陶器、瓷器、三彩器、铜器、铁器、铅器和墓志等。
三彩器1件,为M19出土的三彩抱幢狮子。泥质红陶,模制。头偏右侧,眉目突出,鼻梁扁宽,张口龇牙,右前牙残损,口下长须,双耳后抿,头鬃卷曲,颈带项圈,上饰铜铃。左前蹄抓经幢于胸前,右前腿直立,撑于莲花座,后腿曲蹲,宽尾贴臀,坐在圆形莲花座上,座下设方形冠角台。通体施绿、黄、褐色釉,釉色纷繁复杂。通高29、底座高3.6、底座长11.6厘米。
田伾墓志,盖为方形,盝顶,顶面阴刻楷书“大唐故田府君墓志铭”,共3行9字,四周线刻卷草纹。志石为方形,四周略有残缺。志石边长47、厚12厘米。志文楷书,22行,满行22字,共计351字。
冯氏墓志仅存志石,方形,四周略有残缺。长46、宽46、厚8厘米。志文楷书,26行,满行26字,共计625字。
墓葬纪年明确。M17墓主田伾葬于唐宪宗元和四年(809年),M15墓主冯氏葬于唐文宗大和九年(835年),属唐代中晚期。M19未虽出土明确纪年材料,下葬时间不详,但墓葬形制与M15相近,且埋葬于同一墓区,另根据出土的陶俑和铜钱等遗物判断,可以推测其与M15、M17时代相近,亦为唐代中晚期墓葬。
根据M17墓志内容,墓主田伾终于元和四年(809年),享年53岁,知其生于至德二年(757年)。出身京兆华原(今铜川市),系武官世家,祖父田玉任左武卫中郎将,父田子和任左骁骑翊府左郎将,属于中层武官。
田伾于唐德宗建中三年(782年)参军,贞元元年(785年)获将仕郎散官,并被辟召入河阳节度使幕府,先后任(试)左卫兵曹参军、太子通事舍人、左金吾长史、同州防御使随军知上都留后、郯王府兵曹参军、河东节度使上都留后等官职。
其中,左卫兵曹参军、太子通事舍人、左金吾长史、郯王府兵曹参军等官职应为试官,职事官主要为同州防御使随军以及同州防御使、河东节度使等藩镇的上都留后。
所谓“试者,未为正命”,原本指未正式任命的试摄官。唐代中晚期,这一职位逐渐演变成试假其衔却另有所职的寄禄官,试官沦为仅表明官员等级资历的阶官。
上都留后即诸道进奏官,属于地方藩镇在京城的驻京机构。进奏官最初并非独立的幕职,而是由本镇众多的幕职中选派一人充任,其后因地位日渐重要,才混同于一个独立的幕职。田伾先以同州防御使随军之职被选派为进奏官,后又专任河东节度使进奏官,即反映了诸道进奏官制在唐代中期的重要变革。
冯氏亦出身武官世家 墓志书写者为其幼子
M15墓主为田伾夫人冯氏,在其夫去世二十余年后,于大和九年(835年)在京兆府长安县太平里私宅内辞世,享年七十二岁。冯氏出身京兆新平(今彬州市),其父为汾州军将,亦为武官世家。
田氏夫妇墓志还揭示了唐代家族内部嫡庶子女生活状态的独特视角。志文载,田伾与冯氏生有四子三女,其中长子任左武卫兵曹参军,二子任太常寺丰礼郎,三子多病早亡未出仕,幼子以吏部常选任朝议郎、苏州司仓参军、内侍省学官、上柱国,丁母忧后复授陕州大都督府士曹参军、内侍省学官、上柱国等官职。长女出家为尼,法号惠寂。次女出嫁郗氏,幼女出嫁白氏。在冯氏去世时,仅幼子田文雅和嫁于郗氏的次女尚在世。
值得注意的是,除冯氏所生的子女外,田伾尚有志雅、季雅两位庶子,皆为嫡幼子田文雅之弟。这两位庶子未见担任官职,也未见载于冯氏墓志中,这无疑在一定程度上折射出唐代家族生活中嫡庶有别的社会观念。
此外,冯氏墓志撰写者为“朝议郎前太府寺丞上柱国李述撰”,由其子田文雅书,且在墓志后题“凡六百廿五字,嗣子文雅书”。这在唐代墓志中比较少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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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ohu.com/a/907780828_119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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