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독자 여러분을 존경하긴 합니다만, 그래서 하는 告白은 아니고....예전에 한 일의 결과물 중 하나가 틀렸음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2021년도에 제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판' 조사를 한 적이 있지요. 어떻게 된 게 고고역사부에 4년 있는 동안 고려 묘지명, 현판 같은 중량급 유물 조사를 도맡았습니다.
제가 떠난 뒤에 탁본(종이) 조사를 하더군요. 그건 그렇다치고, 그래도 일은 일이니 열심히 조사하고 사진을 찍고(김광섭 작가님 감사합니다) 번역을 요청하고(송혁기 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검수하고 기간 안에 보고서를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때 제가 유달리 마음이 가던 현판이 하나 있었습니다. 조선 근대의 정치가이자 서화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1820-1898)이 예서로 쓴 <제일난실第一蘭室>이란 편액입니다.
난초와 대나무를 입체적으로 옆에 새긴 각수의 솜씨도 솜씨려니와, 난초 치던 붓으로 단번에 쓴 듯 망설임없이 써내려나간 글씨에 취해 한참 실물을 들여다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 뜻을 "아 난초하면 흥선대원군이니까, 석파 태공이 난초 기르던 방에 붙인 현판인가보다"하고 넘겼더랬지요. 번역 용역을 맡겼던 분들도 그런 의견이었고요.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현판> 보고서에도 그렇게 적혔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어제 다른 무슨 단어의 용례를 찾느라고 <한어대사전>을 뒤지다가 우연히 '난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난실'의 뜻이 "芳香典雅的居室"이요, 영어로는 "a lady's room (honorific)"이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출처가 <문선文選>이라고 하더군요.
<문선>을 뒤져보니 서진시대 문인 장화張華(232-300)의 "정시情詩" 5수 중 세 번째 시에 나옵니다.
清風動帷簾 맑은 바람 휘장 흔들고
晨月燭幽房 새벽달 어두운 방 밝히네
佳人處遐遠 사랑하는 이 멀리 있고
蘭室無容光 난실엔 그 모습 없네
衿懷擁虛景 가슴엔 헛것 끌어안고
輕衾覆空牀 솥이불 빈 침상 덮네
居歡惜夜促 함께할 땐 짧은 밤 아쉽고
在蹙怨宵長 떨어지니 긴 밤 한스럽네
撫枕獨吟歎 베개 만지며 혼자 탄식하니
綿綿心內傷 마음은 아파 끊이 없네
여기에 '난실'이 나옵니다.
문맥상, '난실'은 '가인'이 있어야 하는 공간이며 또 '침상'과 '이불', '휘장'이 있지요.
글자 그대로 '난초의 방' 곧 난초를 기르던 방이라기보다 (물론, 방 한쪽에 난초 화분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정인情人이 머무는 방, "향기롭고 전아한 거실"이라 해야겠지요.
다만, 시적 화자가 아무래도 여성 같은데 그렇다면 <한어대사전>의 "a lady's room"이란 번역은 재고의 여지가 있겠습니다.
하여간 그렇다고 할 때, 대원위 대감께서 쓴 "제일난실"이란 "제일가는 난초의 방"이라고 직역하기보다는 "제일가는 난실蘭室"이라고 하고 '난실'의 설명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혹 부대부인 마님이 머물던 이로당二老堂에 걸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겠군요.
이제 와 보고서를 고칠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잘못 파악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바로잡아야 할 것 같아 올려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글씨(아마 흥선대원군 예서의 기준작이 아닐까 싶을 만큼)를 한 번 더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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