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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에 여행길에 나선 사람들은 宿場에 묵어야 했다.
이들은 宿場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을까?
東海道中膝栗毛에는 이를 유추할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돈이 없는 시골뜨기 영감이 1인당 2백문을 달라는 여관비를 흥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 숙박비는 200문은 못낸다. 160문을 내겠다.
- 대신, 목욕물은 미지근 해도 좋다.
- 채소조림도 한접시면 된다.
- 밥이랑 국도 6-7 홉 정도 먹을수 있으면 OK
- 내일 길을 떠날때 도시락 꾸러미에 밥만 채워주면 된다. 다른건 없어도 된다.
이를 뒤집으면, 200문을 내면 宿場에서는,
- 제대로 된 목욕물
- 두접시 이상의 채소조림 반찬
- 6-7 홉 이상의 밥이랑 국
- 조식 도시락에는 밥과 반찬.
이렇게 제공되었다는 소리가 될테니, 나쁘지 않은 대접이었다 하겠다.
물론, 왠만한 宿場에서는 이불은 제공되는데 정말 싸구려 여인숙에서는 (東海道中膝栗毛에는 주인공이 도둑놈한테 털려 돈 없이 여행해야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이불도 없이 잠을 청해야 하고, 밥 따위도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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