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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초기 발해가 얼마나 험준한 지역에 자리 잡았는가 하는 것은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위도를 보면 알수 있다.
상경용천부의 위도는 일본 홋가이도 북부지역과 거의 같다.
최치원의 "謝不許北國居上表"에 이르기를-.
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孽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라 하여 "측천무후의 시기에 대조영등이 도망가 자리 잡은 땅을 황무지 언덕=荒丘"이라 묘사했던 것이 이해가 간다.
발해가 건국 초기 상경에 자리잡았던것은 당의 통제에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려 했었던 것일테고, 그런만큼 위도가 높아 농사고 뭐고 거의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발해 오경이라는 부수도를 남쪽에 다수 두게 된것은 결국 그나마 그 판도 안에서 농사가 이루어지는 땅을 찾아 팽창해야만 했던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 발해 상경용천부가 얼마나 북쪽에 위치한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비슷한 시기, 일본의 동북지역 개척이 9세기까지도 우리의 평양-함흥선에도 도달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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