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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야요이 벼농사 환호취락의 신호탄 판부유적[板付遺跡, 이타즈케이세키, いたづけいせき]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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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위치를 본다. 
 
 

33°33'56.0"N 130°27'10.0"E · 2 Chome-12 Itazuke, Hakata Ward, Fukuoka, 812-0888 일본

2 Chome-12 Itazuke, Hakata Ward, Fukuoka, 812-088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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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부유적板付遺跡(이타즈케이세키, 이타즈케 유적, いたづけいせき)은 후쿠오카현 福岡県 후쿠오카시 福岡市 하카타구 博多区 이타즈케 板付 에 있는 조몬縄文시대 말기 이래 야요이弥生시대 후기에 걸치는 복합 유적이다. 국가 사적 国の史跡 으로 지정되어 있다.

유적은 수혈 竪穴 건물이나 논이 복원된 공원이 되었으며, 전시 시설(판부 유적 야요이관, 판부유적미생관, 板付遺跡弥生館 )도 있다.


이걸 보면 언덕배기에 환호를 둘러 마을을 만들었음을 본다.




사가현 佐賀県 가라쓰시 唐津市 에 있는 나하타 유적 菜畑遺跡[채전유적] 에 이은 미즈네 경작 [수도경작, 水稲耕作] 유적이며, 후쿠오카현 가스야쵸 粕屋町 의 에쓰지 江辻 유적에 이은 일본에서도 최초기 환호 環濠 취락이기도 하다.

1916년(다이쇼 5년)에 중산평차랑[나카야마 헤이지로, 中山平次郞]이 옹관 내에서 청동 창 青銅製の矛 과 검 剣 이 출토된 사실을 학회에 보고하면서 알려졌다.

야요이 토기에 금속기가 따른 데 대한 첫 보고였다.


이른바 판부1식板付1式 토기. 명치대학박물관明治大学博物館



1950년(쇼와 25년) 1월, 다케시타역 竹下駅 앞에서 재단사를 운영하던 재야 고고학도 나카하라 시게아키[ しげあき, 중원지외현, 中原志外顯)가 우엉밭 ゴボウ畑 을 조사하다가

당시 조몬토기로 통하던 야구식 夜臼式(백기식 柏崎式) 토기 (각목돌대문토기 刻目突帯文土器)와 야요이 토기로 여긴 전기 前期 의 판부식토기 板付式土器 (판부Ⅰ식토기 板付Ⅰ式土器 )를 동시에 채집함으로써 가장 오래된 야요이시대 유적일 가능성이 대두했다.

꼭 암사동 보는 듯하다.


 
일본고고학협회 日本考古学協会 공동연구인 '일본농경문화의 생성 日本農耕文化の生成 ' 일환으로 나카하라 中原 와 규슈대학 九州大学 오카자키 다카시 岡崎敬 , 메이지대학 明治大学 스기하라 쇼스케 杉原荘介 등을 중심으로 한 발굴조사가 4년간 진행돼

단면 V자형 환호 環濠 와 저장구덩 貯蔵穴 , 수혈건물 등이 검출되고 판부식토기 板付式土器 등과 함께 돌칼 石包丁 등 대륙계 간석기 磨製石器 가 출토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환호취락임이 확실해졌다.

또한 탄화미 炭化米 와 왕겨 압흔 籾圧痕 이 묻은 토기 등이 출토됨으로써 벼농사 농경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대량의 제사용 토기가 출토한 판부유적 현장 설명회. 이 친구들도 지들이 모르면 무조건 제사다. 이에 감발한 한국고고학이 줏대없게도 수변제사 운운하는 일로 발전한다. 1979년.



1970년(쇼와 45년) 이후, 공단 판부 단지 公団板付団地 건설이나 구획 공사 등에 수반해 후쿠오카시 교육위원회 福岡市教育委員会 에 의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어, 1976년(쇼와 51년)에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1978년(쇼와 53년)에는 야요이 I층(야요이시대 전기)보다 아래인 조몬시대 말기 토층에서 대구획 논터와 목제 농기구, 돌칼 등도 출토되어 용수로에 설치된 우물 井堰 등의 관개시설 灌漑施設 이 확인되었다.



판부 유적 야요이인 발자국 1978년



논두렁 간격으로 볼 때 논은 한 구획이 400㎡로 추정되며, 꽃가루 분석을 통해 밭농사 畑作栽培 도 추정되었다.

그 결과 벼 농경 그 자체는 야요이시대 최초의 판부Ⅰ식 토기 시대 板付Ⅰ式土器期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1].

^ a b c d  菅波正人 「弥生時代開始期の集落--板付遺跡」/独立行政法人文化財研究所・奈良文化財研究所監修『日本の考古学 -ドイツで開催された「曙光の時代」展』小学館 2005年 82-83ページ

주요 분포 문화층을 보면 

조몬시대縄文時代의 경우, 야요이 시대 아래층에서 확인되며 조문시대 조기縄文時代早期(약 9,000~6,000년 전)의 압형문토기押型文土器가 검출된다. 

야요이 시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저대지 위 환호 취락과 주변 충적지에는 논이 펼쳐져 있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는 무덤이 있다.

환호環濠 내부는 후세 삭평削平으로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된 수혈건물은 에쓰지 유적 등의 동시기 건물터를 바탕으로 복원했다.

환호는 평면 난형 卵形 으로, 남북 110미터, 동서 81미터. 폭 1~5미터, 깊이 1~2.5미터, 단면 V자형이다.

안팎으로 11.5m 정도 토루를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곡물 등의 저장 구멍은 땅에 판 움 형태이며 평면 방형 또는 장방형이다가 시기가 내려가면 원형이 된다.

깊이는 1~2m 정도이며 단면형이 자루 모양 袋状 이 된다.

야구기 夜臼期 부터 판부Ⅱ식 板付Ⅱ式 까지의 저장구덩이가 있다.

환호 북쪽과 남쪽에서 합계 200기 이상 확인됐다.

논 水田 은 대지 서쪽 충적지에서 발견된다. 간선 수로 幹線水路 , 우물 井堰 , 취배수구 取排水溝 , 논둑 畦畔 등이 동반된다.

야구식 夜臼式 (가시와자키식 柏崎式 ) 토기 시대 논 구조가 그 후에도 답습됐다고 생각한다.

판부Ⅰ식 토기는 기종이 옹기 甕 , 항아리 壺 , 바리 鉢 , 고배 高坏 가 있다.

그릇 표면을 판 板 으로 두드려 다듬는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특징은 서일본에 널리 퍼진 온가가와식 토기 遠賀川式土器 에 공통한다. 

이로써 가장 오래된 야요이 문화(조기 早期 )가 시작된다.

즉, 농경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본격적인 벼농사가 이루어진 조몬논 縄文水田 으로 화제가 되었지만, 일부 연구자는 야요이 시대 조기라고 한다.

일본에서의 초기 취락, 벼농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야요이 전기에서 중기에 걸치는 출토품은 마제석촉 磨製石鏃 12점, 석검 石剣 1구다.


앞에서 신동훈 교수께서 이 유적을 잠깐 논급했기에 정리한다. 

 
도작농경에서 한반도 남해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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