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행적은 앞에서 모조리 뽑아다 놨거니와,
이 행적을 보면 참말로 저 양반 무책임 가장 전형이라 할 만해서 놈팽이 딱 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땐 정미소가 없었을 테니, 옆집 혹은 옆동네서는 집집마다 절구에다가 곡식을 넣어 절구공이 소리가 들리는데,
이 집구석은 빻을 곡식이 없어 마누라가 하소연한다.
그런 하소연에 남편이라는 작자, 가장이라는 작자는 곡식을 마련하거나 꿔올 생각도 아니하고는
태연히 하는 말이 절구공이를 소재로 하는 노래 작곡 하나 하고는 이거 먹고 떨어져라 했다 하니
본명을 알 수 없는 그의 호 백결百結도 말이 좋아 백결이지 누더기 넝마라는 말이다.
거지 행색이었으니, 그렇게 하고 싶어 한 것도 아니요, 실제 집구석에 쌀 한 톨 없는 찢어진 가난뱅이 비름뱅이에 지나지 아니한다.
보나마나 온몸엔 이가 득실거렸을 것이다.
이에서 궁금한 점.
집집마다 절구에 빻았다는 곡물은 어떤 곡물일까? 쌀일까 아니면 다른 잡곡일까?
절구공이를 쓴다면 대개 나락을 생각할 테지만, 절구가 소용하는 바가 꼭 쌀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점은 궁구해야 한다.
저 시대, 곧 삼국시대 절구 혹은 절구공이로 출토유물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며,
나아가 그때야 그게 잘하는 일로 생각해서 저런 목제 유물이 나오자마자 쏵 수돗물로 깨끗이 씻고는 기자님들 불러 이런 거 발굴했다 똥폼 잴 때거니와
요새도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곧바로 분석실로 가져가서 잔류물 분석해야 한다.
그래야 그 절구 혹은 절구공이에 남은 부스러기를 통해 어떤 곡물을 빻았는지를 엿보게 될 테니깐 말이다.
흔히 먹고 살 만하면 문화를 찾는다 한다.
그런 점에서 백결선생은 너무 앞서갔다.
제 앞가림, 제 가족 간수도 못하는 주제에 배고프다 먹을 것 없다 하소연하는 마누라한테 예술을 던졌으니, 저런 남편을 둔 저 마누라도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다.
저가 사는 동네를 동리東里라 했다는데, 왜 동리라 했을까?
흔히 신라시대 왕경 구획을 방리제坊里制라 해서, 그 숫자가 사기와 유사가 다르기는 하지만,
사기가 아무래도 맞을 듯하거니와 그에 의하면 왕경은 360방坊 55리里로 구획했다 하거니와
저 방과 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신라사 연구자 천지라,
중심 구역은 坊이라 하고, 기타 교외 지역 짜투리 땅을 里라 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중심 구역 坊은 인구조밀 지역이라 열라 사람이 많고,
里는 그에 견주어 변두리라 지금으로 치면 도농복합지역 비스무리해서 땅을 넓고 인구밀도는 낮은 구역을 말한다.
이걸 보면 그가 사는 낭산 일대가 왜 里였는지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한데 왜 동리東里, 곧 동쪽 마을이었을까?
그를 일컬어 낭산 狼山 아래 살았다 하고, 그런 그를 동리 백결선생 東里百結先生이라 불렀다 하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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