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정리하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2002년 취재수첩이다.
보니 당시 일본의 주요 문화기관들이 일제히 독립행정법인으로 전환한 일을 계기로 그 대상 중 하나인 도쿄문화재연구소를 취재한 내용이다. (2016.4.18)
2002년 11월 27일 도쿄문화재연구소東京文化財研究所 와타나베 아키요시渡邊明義 소장을 인터뷰한 내용이어니와 독립행정법인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점검한 듯하다. 저때 면담 내용은 기사화를 했다고 내가 기억해서 우리 공장 DB에서 검색해봤더니 걸리지 않는다.
이 독립행정법인独立行政法人이란 내 기억에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郎 당시 일본 정부가 문화기관들에 대해 추진한 추진한 이른바 개혁조치 중 하나어니와, 이에 의해 국립기관들인 문화재연구소와 박물관들이 일제히 저렇게 바뀌었다. 이 움직임이 주목을 요한 까닭은 그것이 국내에 미칠 여파 때문이었다.
이 독립행정법인화가 이상했던 점은 분명 그것의 민간화인데, 여전히 공공성을 강조해 현재까지도 국립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 종사자들은 공무원도 아니요 민간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전환이 성공한다면, 그것이 당장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빤했는데, 그리하여 한국문화계도 예의주시하던 상황이었다.
저에 의해 아마 국립대학들도 일제히 저와 같이 변모했다고 기억한다. 저 조치는 결국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 2011년 국립서울대학교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로 전환케 하는 힘이 된다.
저 독립행정법인화에 대해 저쪽 일본 종사자들 얘기를 지금도 들어보면 하나같이 성토 일색이어니와, 저때는 신분전환과 기관 성격 변화에 따른 공포와 불만이 극에 다다를 시점이었으니, 와타나베 소장 또한 이런 질문에 시종일관 일본정부를 성토했다.
저 메모를 보면 독립행정법인화에 의해 도쿄문화재연구소와 나라문화재연구소가 같은 법인으로 통합하되, 나라는 발굴조사에 초점을 두고 도쿄는 수복보존센터로 기능이 분화했지만, 관련 예산은 나라 쪽이 훨씬 많다는 내용이 보인다.
저 2000년 무렵은 일본을 더러 왔다갔다 할 적이었거니와, 무엇보다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최를 앞두고 두 나라 우호 증진이라는 차원에서 문화계에서도 교유가 활발할 때라, 공무를 빙자한 출장이 가끔씩 있었다.
저 취재수첩은 요새 일선 취재현장에서는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요새는 아무도 수첩에다가 메모하지 않는다. 그리 하는 사람은 나같은 노땅 그룹이다. 요새 기자들은 모조리 폰 녹음기능 켜고 녹음해서 나중에 풀어보며, 덧붙여 촉급할 때는 노트북에 그대로 받아쳐서 그대로 보내버리면, 그와 보조를 맞추는 다른 기자가 그걸 토대로 해서 기사를 생산해 내보낸다.
이제 일선 취재현장에서 사라진 취재수첩은 어디로 갔을까? 북한으로 갔다. 청와대로 갔다.
이 취재수첩 열심히 기록했다 개피 본 일이 있다. 안종범이다. 청와대 수석시절 그가 꼼꼼히 기록한 취재수첩은 나중에 독이 되어 돌아왔다.
취재수첩! 쓰지 마라.
사초는 이렇게 인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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