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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간신諫臣 vs. 간신姦臣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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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업이 글쓰기인지는 모르겠다. 

 

아닌 듯한데 그렇게 보시는 분도 있을 것이므로 일단 여기서는 그렇게 간주한다. 

이런 글쓰기(나는 이를 자주 야부리로 표현한다)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늘 조심해야 할 점 중 하나가  

청중이, 독자가, 시청자가 듣고 싶은 말만 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개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좋은 작가는 그들이 불편해야 하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글쓰기는 시종 유혹과의 백병전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용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듣고 싶지 아니하는 말을 들을 여유, 혹은 그런 문화가 조성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가? 


뭇매 맞기 십상이라,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곧 매장과 동의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 곳곳에서 일어난다. 


실상은 전연 딴판이나, 시종일관해서 당 태종 이세민을 간언諫言을 잘 용납한 성군聖君의 이상으로 그리고자 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비꼬아서 텍스트를 소화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실제의 이세민은 간언을 용납하는 군주와는 전연 딴판이었다. 여타 군주나 마찬가지로 이세민은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정관정요》는 어쩌면 위징魏徵 열전이다. 이세민을 보좌하는 간관이자, 재상으로서 이세민이 싫어할 소리만 일삼는다. 


그런 쓴소리를 이세민은 항용 성가시게 여기면서도, 언제나 그를 옆에다 두고 중용했다고 역사를 가르치지만, 위징은 언제나 위태위태한 길을 걸었다. 




이세민 사후에 편찬한 《정관정요》를 편찬한 자들은 이 텍스트를 이세민 성군 만들기 일환으로 기획했을지 모르나, 실상은 위징 찬송가다. 


《정관정요》가 실상과는 사뭇 다른 역사조작이라 해도, 그것이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간언의 위험한 줄타기를 여지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고 나는 본다. 


간언이란 무엇인가? 


듣는 이가 불편해 하는 말이다. 듣는 이가 속이 거북해지는 말이다. 

이런 이를 우리는 간신諫臣 혹은 간관諫官이라 한다. 


대중이 듣고 싶은 말만 가려 하는 자, 이를 우리는 간신姦臣이라 하며, 

그런 일을 일삼는 행위를 우리는 영합迎合이라 하며, 

그런 주체가 특히 이른바 식자층 혹은 엘리트층일 때 그런 행위를 곡학아세曲學阿世라 대서특필한다. 


하지만 간신諫臣과 간신姦臣은 실은 종이 한장 차이라, 


나 역시 한때는, 혹은 가끔씩 간관을 지향한답시고  

그리하여 그런 간언들을 하는 일을 '상식과 통설에 대한 저항'이라 하며 자못 거창하게 부르짖으며, 

시대와 대중의 욕망과는 배치하는 말들을 가끔씩 내뱉으며, 

그리하여 때로는 돌팔매 뭇매를 더러 맞기도 하면서 

뭐 나름으로는 핍박받는 지식인? 혹은 글쟁이를 알량하게 자처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보니 내 삶, 내 꼬라지가 시종하고 일관하게도 부끄러운 일들로 점철하니


청동거울 녹이나 닦아 보련다. 


그리하여 방구석 한켠에다가 곡아曲阿라 자호自號하고는 큼지막하게 붙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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