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ures by Songeun Yeo
진흥왕비는 두 명이다. 선비先妃는 앞서 말한 어머니가 같은 지소태후인 숙명淑明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공히 진흥왕비로 기록한 사도思道는 애초에는 후궁이었다가 숙명이 쫓겨나자(실은 스스로 물러나자) 뒤이어 왕비가 되었다.
그 교체 시점은 나중에 말하게 되겠지만 진흥왕 재위 27년(566) 무렵이다.
그렇다면 왕비 교체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앞서 본대로 진흥왕은 왕비 숙명이 어머니가 같다 해서 총애하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숙명 역시 다른 남자를 찾아다녔으니, 그가 바로 어머니 지소가 총애하는 청년 이화랑이었다.
이화랑은 지소가 아낀 데다가 음악과 문장 모두 잘해 궁중을 드나들면서 지소의 잠자리까지 시중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화랑은 자연 지소의 딸들인 황화와 숙명, 그리고 송화 공주에게는 선생 구실을 하기도 했으니, 이런 기회를 발판 삼아, 이화랑 역시 숙명과 가까워졌다.
진흥과 숙명 사이에는 정숙貞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정숙은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궁 소생인 까닭에 다음 보위를 이을 태자에 책봉되었다.
숙명은 어머니가 태후로써 국정을 농단하는 데다, 아버지가 다름 아닌 상대등 이사부인 까닭에
"(진흥)왕이 공주를 소홀히 대할 수 없으니,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게 굴었다. (정숙) 태자를 낳고 황후에 봉해지자,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왕이 평소 사도 황후를 총애하여 (그에서 낳은)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4세 이화랑 전)
남편한테 사랑도 받지 못하지, 젊고 잘생긴 애인까지 생겼으니, 왕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만다. 이화랑 전 한 대목이다.
"이에 이르러 숙명 후后는 (이화) 공과 더불어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해지고 여러 번 왕에게 틀키기도 하니, 왕이 (숙명 황후를) 폐위하려 했지만, (어머니인 지소) 태후가 울면서 말리니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왕이 숙명과 섹스를 하지 않았는데도 숙명이 스스로 임신했다. 이에 (이화)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궁을 나가니 뭇 신하가 (정숙) 태자조차도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이에 동륜을 태자로 삼았다."
이로 볼 때 바로 동륜이 태자로 책봉된 시점이 바로 왕비가 교체된 시점임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그 시점이 보이지 않으나, 《삼국사기》신라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왕 재위 27년(566) 2월에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다 했으니, 이해 혹은 그 직전인 재위 26년 무렵이 왕비가 교체된 시점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어머니 숙명이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면서 자연히 그 아들 정숙 또한 태자 자리에서 폐위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후비로 책봉된 사도에게 동륜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니, 정숙은 태자 자리를 더는 지킬 보루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쫓겨난, 아니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왕비 자리조차 초개와 같이 던져버리고 궁밖으로 나간 숙명은 앞날이 어찌 되었을까?
이 둘 사이에서 신라 역사가 새로운 챕터를 열게 되니, 원효와 의상 이전 신라 불교계 최고 스타 승려 원광이 바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원광법사는 불륜의 씨앗이었다.
원광을 둘러싼 모든 행적, 특히 그 출생 시점은 논란이 다대하지만, 그 다대한 논란은 《화랑세기》를 통해 일거에 비밀을 푼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 원광을 중심으로 전개해 보고자 한다.
비밀은 장막을 풀고서 마침내 우리 앞에 선다.
(201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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