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한테 물려죽은 진흥왕의 태자] 스핀오프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편년체 정사로서는 참말로 불친절하기 짝이 없으니, 무엇보다 너무나 축약이 많아 전후맥락이 생략한 기술 천지라는 점이 첫 손에 꼽힌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까 하는 단서를 우리는 그것을 지어받치면서 그 시말을 정리한 편찬 총책임자 김부식의 말에서 일단을 추론하니 무엇보다 《삼국사기》 이전 그 위치를 점한 《삼국사三國史》의 번다함을 꼽을 수 있다.(이 《삼국사》를 김부식의 《삼국사기》 출현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구삼국사舊三國史》라 부른다.)
이 번다함은 김부식보다 후대에 태어나 《구삼국사舊三國史》와 《삼국사기》를 모두 본 이규보가 전재한 《구삼국사》 동명왕편東明王篇으로 증명하거니와 두 판본을 비교하면 《삼국사기》가 무엇을 지향했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요컨대 《삼국사기》는 《구삼국사》의 핵심 요점 정리 노트였다. 이것이 결국은 《구삼국사》에 대한 《삼국사기》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하는 힘으로 작동했으니 마침내 《구삼국사》는 영원히 사장되고 말았으니 그에서 후대 사가들의 고민이 비롯한다.
그런 까닭에 《삼국사기》 기술은 대부분 느닷없는 느낌을 준다. 왜 이 사건이 튀어나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가 대부분이다.
아래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왕본기 27년(566) 기술도 느닷없다.
二十七年 春二月 祇園·實際二寺成 立王子銅輪爲王太子 遣使於陳貢方物 皇龍寺畢功
27년 봄 2월에 기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완공되었다. 왕자 동륜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토산품을 바쳤다. 황룡사 건설 공사가 끝났다.
이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대목은 立王子銅輪爲王太子, 곧 왕자 동륜을 세워서 왕태자로 삼았다는 대목이거니와 여간히 주목하지 않으면 이 대목 허심하게 넘기기 십상이다.
신라본기 전체를 내가 아주 쏵 검토한 것이 아니지만 이 대목 아주 이례적이다. 본기에 아들을 태자 혹은 세자로 삼았다는 기록 자체가 극히 이례적이다.
간단히 말해 통상적인 입태자立太子는 기록하지 않는 원칙이 《삼국사기》에는 있었다. 이는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임에도 통상적인 태자 책봉을 《삼국사기》는 적지 않는다는 편찬 수칙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이 가뭄에 콩나듯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동륜銅輪은 태자 책봉 사실이 특기特記되었는가? 바로 이 점을 모든 역사가가 놓친 것이다.
왜 이 기록이 남았을까? 기존 태자가 폐위되고 새로 태자가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화랑세기》에는 보인다. 그에 의하면 단순히 태자가 바꼈을 뿐만 아니라 왕비도 바뀌었다.
본래 진흥왕비는 숙명淑明이었다. 하지만 숙명이 딴 남자랑 바람을 피우고 그 씨까지 배자 참다 못한 진흥이 마침내 칼을 빼어들고는 숙명을 쫓아낸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숙명 또한 에랏 잘 됐다며 왕궁을 빠져나와서는 애인 이화랑과 딴 살림을 차리니 그 소생 정숙貞淑 태자 역시 폐위되어 왕자로 격하되고 만다.
그들이 빈자리를 후궁 사도思道와 그 아들 동륜이 채운 것이다.
한편 저 때 왕궁을 탈출하고 이화랑과 살게 된 숙명은 곧이어 이화랑 아들을 출산하니 그가 바로 신라의 영웅 원광圓光 법사였다.
역사는 불륜이 만든 교향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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