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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치맛바람] (8) 아들을 낳지 못한 도종道宗의 두 번째 황후 소탄사蕭坦思, 그 비참한 최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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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 의덕황후懿德皇后 소관음蕭觀音이 궁중 가수랑 바람 났다 해서 자진케 하고선 도종道宗은 새로운 황후를 들이게 되는데, 그가 소탄사蕭坦思다.

부마도위駙馬都尉 소하말蕭霞抹의 여동생으로 태강大康 2년(1076), 재상宰 야율을행相耶律乙이 추천해 액정掖庭에 들어왔다가 합격점을 받아 그해 6월 황후에 책봉됐다.

야율을행이 누구인가? 의덕황후 사통 사건을 조사해 사실이라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킨 사람이다.

그가 정국을 틀어쥐었으니, 아마도 그가 그의 오빠 소하말이 자기 사람이라 해서 그 누이를 궁중에 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황후한테 권력의 완성은 아들이다. 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언젠가는 총애는 쇠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탄사는 문제가 있었다. 황후가 된지 몇 년이 지나도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다. 

황후로서도 조바심이 못내 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에 따른 기상천외한 비상책을 쓴다. 

그의 동생 알특란斡特懒이 있었다. 이 여동생은 당시 야율을행耶律乙辛의 아들 야율수耶律綏란 결혼한 상태였다.

소탄사는 그런 동생이 아들 낳기에 적합한 여인이라 해서 이혼케 하고는 후궁으로 들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소탄사는 자신의 권력 혹은 황후라는 신분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아들 낳기에 실패했다. 

이렇게 되자 이미 연로해진 도종 역시 더는 기다릴 처지가 아니었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그에게는 당시 아들이 없었지만, 본래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조강지처 소관음蕭觀音한테서 황자를 보았으니 그가 바로 야율준耶律濬이었다.

이 야율준은 도종의 장자로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 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아 6살에 양왕梁王에 책봉되었다가 2년 뒤인 8세 때는 마침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태자는 야율을행耶律乙辛한테서 누차 모함을 받은 데다 나중에는 결국 모반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태자 자리에서 폐위된 데 이어 태강 3년(1077)에는 마침내 야율을행 손에 죽으니 그때 나이 겨우 20세였다.

 

아들은 명령이다. 이 아들이 없으면 쫓겨났다.



이를 보면 도종의 조강지처 소탄사가 정말로 궁중 가수 조유일과 바람을 피운 것인가 의문이 든다. 아무래도 야율을행이 꾸민 모함 아닌가 싶은 느낌이 짙다. 

아무튼 태자 야율준은 죽기 전 소골욕蕭骨浴을 태자비로 받아들여 죽기 두 해 전(1075)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그가 야율연희耶律延禧라, 훗날 그가 거란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帝다. 

아버지가 태자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죽은 까닭에 야율연희耶律延禧 또한 아마도 서인 신분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를 대체할 아들이 없던 도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려 아들 대신 곧바로 이 손자를 지명해 후계자로 삼는다.

그 전 단계로 도종은 이 손자를 태강 8년(1082)에 양왕梁王에 책봉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황후 소탄사와 그의 여동생으로 후궁으로 들어온 소알특란은 처지가 묘해졌다.

도종 역시 이들을 그대로 두면 나중에 자기 손자한테 후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가만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소탄사는 후궁 중 한 등급인 혜비惠妃로 강등케 하고는 멀리 건릉乾陵으로 보내버렸으니 이는 실상 유폐다. 아울러 그 동생 알특란은 본가에 보내버렸다.

이렇게 되자 본가에서 얼마나 황제를 향한 원망이 많아졌겠는가? 

두 자매의 어미 연국부인燕國夫人이 후계자인 양왕梁王을 저주했다 해서 죽임을 당하고, 혜비로 강등된 소탄사는 아예 서인으로 폄적되어 의주宜州 땅에 유폐되고 그의 아우 형제들은 모조로 흥경궁興聖宮 노비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종이 죽고 그 손자가 황제가 되어 통치한지 한참이 지난 천경天慶 6년(1116), 소탄사는 부름을 받고는 태황태비太皇太妃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꿔다논 보릿자루 신세라

그로부터 2년 뒤에 흑정산黑頂山이라는 데로 도주했다가 거기에서 죽어 태자산太子山에다가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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