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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패자 돌궐이 와해하자 당 왕조는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그 기쁨은 너무나 찰나였다.
돌궐이 물러난 자리에 회흘이 들어섰다.
서남쪽에서는 토번과 토욕혼이 비대해졌다.
안사의 난에 진압군으로 참전한 회흘은 그 대가를 요구했다.
황제의 딸을 데려가고, 비루한 말들을 고가로 사달라고 요구했으며
장안을 방문한 회흘 사신은 위수지역을 벗어나 장안 거리를 활보하며 깽판을 치고 사람을 죽여도 중국의 황제는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토번은 장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짠보가 중국의 황제를 우습게 보는 시대였다.
동아시아 역사를 통괄하면 늘 이러했다.
우리는 중국의 팽창에 박수를 보냈지만, 그 박수는 돌이켜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일전에 만난 어느 몽골 친구의 말이 뇌리를 때린다.
"몽골 인구가 천만이 되면 중국을 친다" {201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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