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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김연수 현 원장이 빠졌는데 이름이 연구원으로 바껴서인지 아니면 현직이라선지는 모르겠다.
연구소는 문화재연구실에서 뿌리를 찾는데 그 창설은 1960년대 말이라 국립박물관에 있던 김정기가 넘어옴으로써 시작을 알린다.
그 오양붕을 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나는데 건축 우위 혹은 그 독패 시대가 상당히 오래 지속됐다는 점이 그렇다.
장기집권한 김정기 이래 장경호 김동현에 이르기까지 고고학 미술사 민속학은 쪽도 쓰지 못했다.
왜 그럴까? 저들이 실은 고고학 영역까지 다 장악한 까닭이다. 한국 국가 고고학은 실상 고건축이 개척했고 저들이 실상 한국고고학을 개척한 사람들이다.
그 아성을 깬 이가 조유전. 하지만 이내 그 자리는 도로 건축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정년퇴임과 더불어 당시 마흔아홉 새파란 기술고시 출신 건축학도 김봉건이 먹어버렸다.
이후 백가쟁명 시대가 비로소 펼쳐지는데 김영원 강순형 김연수가 미술사학도요 최맹식 지병목이 고고학이다.
최종덕은 김봉건과 마찬가지로 기술고시 출신 건축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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