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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나주시 오량동 가마유적 지도위원회 회의자료(2002. 5. 25)

by taeshik.kim 2023.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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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오량동 가마유적 지도위원회 회의자료
 
일시 : 2002년 5월 25일
장소 : 나주시 오량동 발굴조사현장
주관 : 목포대박물관∙동신대박물관
나주시 오량동 가마유적
 
지도위원회 회의자료  
 
 

2001년 오량동 가마 조사 모습이라고 검출된다.


Ⅰ. 조사개요
ㅇ 유 적 명 : 나주 오량동 유적
ㅇ 유적위치 : 전남 나주시 오량동 산27-3번지 일대
ㅇ. 조사유적 및 범위 : 총11,912㎡중 가마 2기
ㅇ 유적성격 : 삼국시대 대형옹관가마(5세기 후반~6세기초)
ㅇ 조사기간 : 2002년 3월 21일 ~ 5월 29일
ㅇ 조사기관 : 공동조사(목포대학교박물관, 동신대학교박물관)
조 사 단 장 : 최성락(목포대학교 박물관장)
지 도 위 원 : 지건길(국립중앙박물관장)
조유전(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성구(국립광주박물관장)
최몽룡(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책임 조사원 : 이정호(동신대학교 박물관 전임교수)
조 사 원 : 박철원(동신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조사 보조원 : 이수진(동신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홍민영(동신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ㅇ 조사방법 : 학술발굴조사
 
Ⅱ. 조사경과
 
가. 조사목적
ㅇ 분묘조성으로 인해 파괴∙노출된 가마유적의 성격을 파악하고 향후 향후 보존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나. 조사경위
ㅇ 동신대박물관에서 2001년 문화유적 절대좌표(GPS; global positioning system; 위성항법장치) 확인을 위한 자체조사를 기획, 시험 운용하던 중 분묘조성으로 인해 이 유적이 훼손∙노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시급한 수습조사와 보존대책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목포대 박물관과 동신대 박물관은 2001년 8월 공동학술조사팀을 구성하고 자체적인 조사재원을 확보하여 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제9호 가마에 대한 부분 시굴조사를 시행한 결과 옹관을 소성하던 가마터임이 확인되었다. 
 
ㅇ 2002년 양 대학은 나주시와 협의하여, 이미 노출된 총 17기의 가마 중 제3호가마와 제9호가마의 2기를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착수하였다. 조사결과 계획된 2기 외에 시간차이를 두고 중복되어 축조된 가마 3기를 추가로 확인하여 총 5기의 가마를 조사하였다. 
 
ㅇ 가마는 5기 모두 옹관을 소성하던 가마로 밝혀졌다.
 
ㅇ 더불어 주변 유구의 확인조사 결과 삼국시대 석곽묘 2기를 조사하였다.
 
다. 유적현황
ㅇ 이 유적은 북위 34°97′78″ 동경 126°67′33″(Tokyo Datum; B지구 기준)에 위치한다. 나주시를 관통하는 영산강 중류에 입지하고 있으며, 오량동에서 동수동에 이르는 해발 2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역(속칭 우두머리산일대) 3개소에 걸쳐 분포한다. 이들 유적을 각각 ‘A지구’, ‘B지구’, ‘C지구’라 명명하였다. 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적의 전체 면적은 247,369㎡로 추정되는데 ‘A지구’가 10,004㎡, ‘B지구’가 205,248㎡, ‘C지구’가 32,117㎡에 이른다. 
 
ㅇ ‘A지구’ 구릉의 동북부에는 오량동고분이 위치하고 있으며 영산강 건너 약 2㎞지점에 다시면 복암리고분군이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낮은 구릉지대가 펼쳐지는데 약 6㎞지점에 반남고분군이 위치한다. 동남쪽 역시 낮은 구릉지대가 전개되어 있으며 약 6㎞지점에 세지면 송제리 석실분이 위치한다. 이외에도 주변 구릉지대에는 중소형 고분군을 비롯하여 다수의 유적이 산재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가 시행된 가마유적 B지구에서도 유구범위를 확인하기 위한 트랜치조사 결과 2기의 삼국시대 석곽묘를 확인할 수 있었다. 
 
ㅇ ‘A지구’와 ‘B지구’ 사이에는 고방골, ‘B지구’와 ‘C지구’사이에는 정소리들 등 지대가 낮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는데, 농경지사이의 수로 단면에서 짙은 뻘층이 확인된다. 과거에 영산강의 수로가 이 일대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ㅇ 가마에 대한 조사결과 제3호가마에서는 중복된 가마 1기(제3-2호)가 추가로 확인되었으며 제9호가마에서도 역시 중복관계를 보이는 가마 2기(제9-2호, 제9-3호)가 추가로 확인되었다. 
 
ㅇ 가마의 중복형태로 보아 최초 가마를 축조하여 사용하다가 자연붕괴 등으로 폐기되면 가마의 가장 안쪽(굴뚝부분)에서 시작되는 가마를 재차 만들어 나갔다. 
 
ㅇ 가마의 잔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가마는 구릉의 경사면을 직교하여 터널처럼 파들어 간, 완전히 지하에 구축된 밀폐형의 터널구조이다. 형태는 연소부와 소성부의 구분이 거의 없이 단일구조로 이루어진 통가마이다. 가마 바닥도 연소부와 소성부의 구분이 거의 없으며 연소부에서 약간의 단을 지며 올라가 소성부를 이룬다. 가마는 연소부로부터 소성부 끝까지 약간의 경사를 가지고 있으나 경사각도는 7°내외이다. 가마입구의 바깥부분은 넓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는데 가마 축조시에는 작업공간으로, 실제 운영시에는 메워져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가마의 굴뚝부분은 삭토(削土)가 심하여 확인할 수 없었다. 
 
ㅇ 가마의 규모는 다음 표와 같다.
 

 
호수
크기(cm)
비고
전체길이
소성부
연소부
작업구
길이
너비
깊이
길이
너비
깊이
길이
너비
깊이
1
3
891
507
200
54
124
188
60
260
376:
180:
115
 
2
3-2
788
449
158
107
118
124
87
221
395:
110
 
3
9
906
518
190
66
210
176
61
178
436:
188:
97
 
4
9-2
766
410
148
117
196
128
99
160
384:
188:
103
 
5
9-3
772(?)
392
146
140
180
102
102
200(?)
204(?)
111
작업구
일부유실


 
ㅇ 가마의 연소부는 목탄과 재, 그리고 강하게 소결(燒結)된 회색의 바닥토양이 2~3겹 중첩되어 있다. 벽은 강한 열로 인해 매우 단단하게 소성되었으며 회색 또는 회청색을 띠며 유리질화된 부분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벽은 6~8cm정도 두께를 이루고 있으며, 가마 내부의 연소시 간접적인 열을 받은 벽 바깥부분의 범위는 6~10cm에 이른다. 
 
ㅇ 가마의 소성부는 가마 천장이 무너져 바닥전면을 덮고 있다. 바닥은 소성부와 다르게 소결이 약한데 연소부에 가까울수록 소결 정도가 강하다. 벽은 바닥과 달리 열에 의해 단단하게 소결되어 있으나 유리질화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벽의 두께는 4~8cm정도이며 연소실에서 멀어질수록 두께가 얇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가마 내부의 연소시 간접적인 열을 받은 벽 바깥부분의 범위는 6~10cm에 이르나 역시 연소실에서 멀어질수록 그 범위가 좁아진다. 
 
ㅇ 소성부 바닥에서는 다량의 옹관편이 가마 양측벽에 정리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옹관편의 사이 사이에 토기도 수 점 확인된다. 가마가 옹관을 주로 하되, 옹관을 거치하고 남은 빈 공간에는 소량의 토기를 놓아 동시에 소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ㅇ 가마입구는 소성부의 전면(前面)이 모두 열린 형태이며 소성시에는 갈대과의 식물줄기(볏짚추정)를 섞은 점토를 쌓아 소성부 전면(前面)을 밀폐하였다. 가마의 소성부를 완전히 열어서 옹관을 가마내부로 들여 거치한 후, 다시 불을 지피거나 땔감을 넣을 수 있는 입구만 남기고 전체를 밀폐하였으며 환원소성시에는 모두 밀봉한 것이라 추정된다. 
 
ㅇ 가마입구의 바깥쪽 작업구는 가마에 비해 넓고 평면 원형에 가깝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작업구 내부에는 다시 완만한 단을 두고 보다 좁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다. 내부 토층의 퇴적상태를 보면, 최하층은 목탄과 재가 섞인 어두운 색조의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목탄+재의 순수층과 어두운 색조의 토양이 서로 교차하는 층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가마가 폐기된 후 퇴적된 토양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 보아 가마가 직접 운영되었던 시기의 층위는 중간층인 목탄+재의 순수층과 어두운 색조의 토양이 서로 교차하는 층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작업구의 최하층은 가마의 축조 또는 초기운영(또는 시험운영)과 관계되는 층위가 아닌가 여겨진다. 
 
ㅇ 가마의 출토유물은 다량의 옹관편을 비롯하여 개배류, 기타토기편 등이 있다. 
 
ㅇ 석곽묘는 2기가 조사되었다. 석곽의 상부는 공사로 인한 삭토과정에서 이미 유실되었으며 하부의 바닥과 하단 벽석만 일부 남아있다. 벽은 기본적으로 석재를 사용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옹관편을 깨어 쌓은 곳도 있다. 석곽의 바닥은 옹관편을 잘개 깨어 전면에 깔았다. 시기는 6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되나 부장유물이 없어서 확실치 않다. 크기는 길이 188~190cm, 너비 106~145cm이다. 
 
Ⅲ. 조사성과
 
ㅇ 발굴 조사된 가마는 당초 예정이었던 2기보다 늘어난 5기를 발굴하였다. 이 가마들은 시차를 두고 중복되어 축조∙사용되었다. 
 
ㅇ 발굴된 5기의 가마가 사용된 기간은 대체로 5세기 후반~6세기 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ㅇ 가마가 입지한 곳이 영산강의 수로와 연결되던 곳으로써 가마의 입지선정이 옹관의 운송(運送)을 고려한 것으로 추정된다. 
 
ㅇ 이 유적은 복암리 고분군(사적404호)과 마주한 곳에 입지하고 있으며 출토된 옹관과 토기 등이 상통하고 시기적으로도 일치하는 바, 복암리고분군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유적으로 볼 수 있다. 
 
ㅇ 더불어 이처럼 대량의 가마유적이 한 지역에 집중되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 이 가마유적이 복암리 고분군을 조영했던 당시 지배세력에 의해 관리∙운영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ㅇ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고분에 사용된 전용옹관(專用甕棺)의 제작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ㅇ 향후, 고대사회의 연구에 있어서 생산체계, 유통과 소비체계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가 된다. 
 
 
Ⅳ. 협의사항

1. 유적의 성격
2. 향후 조사계획
3. 유적의 보존 및 문화재지정 문제
4. 출토유물의 매장문화재등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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