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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결코 자연적이지 않은 부계 종족 집단

by 신동훈 識 2025.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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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중 혹은 친족하면 대개 부계 집단 위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걸 곰곰히 생각해 보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이러한 부계 중심의 사고는 종법에 입각한 유교윤리의 관철이라는 점이 중요하겠다. 

예를 들어 이러한 부계중심의 종법이 완전히 관철되지 않았던 시대의 

안동권씨 성화보나 문화유씨 가정보 같은 것을 보면 

복잡하게 설명해 놨지만 일언이폐지하여 설명하자면 

친가든 외가든 아는 사람은 다 적어 놓은 것으로 

사위의 사위의 사위까지 줄줄이 적어 놓아

이 족보는 단순히 안동권씨나 문화유씨 집안의 족보라기 보다는

한 번만 이 집안과 연결되면 권씨나 유씨와는 별개의 부계 집안의 족보도 몽땅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는 

친가나 외가 처가 아는 사람 위주로 만나게 되니 

외가 처가 다 빼고 친가만 간추린 부계중심의 계보라는 것이 오히려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족보라 할 것이며

이 안동권씨 문화유씨의 초기 족보가 오히려 현실을 더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안동권씨나 문화유씨 집안에는 자기 부계 정보 외에 한 다리라도 걸치면 몽땅 계보를 다 실어 놓은 덕에 

당시 조선 전기 유력 가문 계보의 70프로 정도가 이 두 집안 족보에 실려 있다고 하는 반면

조선시대 중후기 이후 족보가 부계족보로 전환하면서 부터는
오히려 정보가 부실해 지는 것을 본다.

우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은 부계 친족을 줄줄이 꿰고 있었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이미 4-5대 전에 갈라져 다른 고장으로 이거해버린 씨족의 경우에는 

수단도 제대로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족보에 자손이 없다는 "무후無後" 대신 

"수단불래"라는 글자를 알뜰하게 남겨 놓았는데 

이는 그 후에 새로 족보를 편찬할 때 이 쪽은 후손이 끊긴 것이 아니라 

수단을 못해 기록은 못하지만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징표를 남겨 놓은 것이겠다. 

요약하자면, 

조선시대 중후기, 우리나라 족보가 친가, 외가, 처가를 망라한 종합 선물세트 같은 족보에서 

부계 중심의 종법에 입각한 족보로 바뀌면서 

족보의 정보가 많이 소략해 졌다는 것은 옛 족보를 몇 번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으로 

우리가 내 주변의 친가, 외가, 처가 등등 관련된 사람의 계보를 몽땅 그리고 설명하라고 하면

어찌 어찌 그려 완성하겠지만 

지금 나와 같은 동성동본의 전국적 계보를 완성하라고 하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다. 

따라서 부계족보라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만큼

만드는 데도 공이 훨씬 더 들었다고 보아도 되겠다. 

이러한 부계 족보가 나름 충실해 진 것이 언제이냐

대략 19세기부터 전국적 규모의 부계 족보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되었고, 

제대로 완성된 것은 일제시대다. 

19세기만 해도 부계 족보는 구멍이 숭숭 뚫린 상태로 

특히 후손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집안의 경우라면 더 심했다. 


*** [편집자주] ***





남당 박창화 문건 중 화랑세기와 세트를 이루는 족도族圖다.

표제엔 상장돈장이라 해서 이 문서가 작성(필사)된 시점을 표시하지만 내용을 보면 화랑세기 등장인물 족도다.

이 족도 부계 위주 족보에 익숙한 사람들한테는 대단한 혼란을 주지만 살피면 이처럼 효율적인 족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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