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처음에는 족보라는 건 모두 안동권씨 성화보처럼 저런 구조였다.
부계 모계 의미 없을 정도로 오가며 아는 계보를 다 적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인물들 계보가 다 적히니
결국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족보, 주소록 성격이었다고도 하겠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 종법에 대한 사회적 강제가 강해지면서
족보의 성격도 바뀌어 부계가 강조되게 되었다.
지금과는 다른 성격의 족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상촌 신흠은 17세기 초반, 자신의 집안 족보를 편찬하고자 하였는데,
그가 생전에 파악한 계보는 다음과 같았다.
이 부계 계보를 보면, 자신과 가까운 부계는 자세하지만 이와 멀어지면 소략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한 것이다. 상촌 신흠이 이 족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이미 이 집안 각 파가 갈려 나간지 200년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파에서 또 지손들은 어디론가 세거지를 옮기니
200년이라면 30년 1대로 친다면 무려 7-8대를 지나있을 때가 된다.
모든 부계 친척을 다 파악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흠은 죽기 전까지 이런 형태의 계보만 파악해 놓은 상태에서 마무리를 못했고,
그의 아들 신익성이 족보 편찬 작업을 이어 받았다.
그가 쓴 편지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 태사(太史, 신숭겸)의 후예는 동방에서 벼슬한 지 천 년이 되었지만 씨족의 족보가 전하지 않으니 자손의 수치입니다.
선친께서 유배 중에 대략 편찬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이어서 완성할 책임은 실로 제게 있습니다.
한창 각 파를 수집하여 전의이씨(全義李氏)의 예를 모방해 성보를 편찬하고 있습니다.
장차 간행하여 전하면 이를 이어 큰 족보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존장께서는 자신의 계보 및 내외 자손의 이름을 적어 보내주십시오.
대구 의성에도 동성이 많으니, 만약 제 뜻으로 본도의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있는 곳마다 기록하여 보낸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익성은 자기 파는 알겠지만 다른 파의 후손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의 편지를 보면 "대구와 의성에도 동성이 많으니" 통문을 보내 기록하자,
다시 말해 수단 단자를 받도록 하자,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노력 덕에 이 집안은 1636년 마침내 족보가 완성되었는데
그렇게 완성된 족보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파악되지 않은 부계 후손들이 아직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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