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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경기도박물관이 새로 개비한 조선시대 초상화

by taeshik.kim 2023.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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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張晩 초상 Portrait of Jang Man 조선 18세기 경기도유형문화재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옥천부원군 문중 위탁 위탁 504 장만(1566-1629)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며,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표 1등에 올랐다. 경기도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두 점의 장만 초상 중 일상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장만은 이괄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 에서 머물다 한쪽 눈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장만은 안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17세기 초에 처음 그린 초상을 나중에 다시 본떠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선비가 한가하게 머무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든 자세 등은 신선을 연상케도 한다. 장만이 입은 심의深衣의 깃과 소매의 형태, 안감의 색 등도 일반적인 조선의 복식과 차이가 있다. 장만의 문집에 선조로부터 금룡金龍 이라는 부채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와의 연관성도 흥미롭다.



경기도박물관은 아마 조선시대 초상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리라.

그런 까닭에 이 초상을 전매특허로 내세우는데, 근자 경기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조선시대 사대부들 초상 코너를 개비했다.


박세채朴世采 초상 portrait of Park Se-chae 반남박씨 문순공현석종회 기증



이 코너 대문은 다음과 같거니와 그 주요 전시작을 사진으로 감상한다.


경기인을 만나다
Meet GyeongGi People


초상화는 어느 특정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옛 조상들에게 초상화는 단지 기록이나 예술 작품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제작을 준비하는 시점부터 정성을 다했으며, 완성 후에는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여겼다.


조영복趙榮福 초상 Portrait of Jo Youngbok 조선 1725년 진재해秦再奚 조현종(함안 조씨 참판공파 종중) 기증 보물 소장 2563 조영복(1672-1728)은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함안,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며, 노론에 속하였다. 1705년 과거에 합격한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1722년 유배되었다가 1725년 복직하였다. 조영복 초상은 2점이 전하는데, 모두 보물로 지정 되었으며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한다. 이 그림은 왕의 초상을 그릴 정도로 당시 가장 명망 높았던 화가 인 진재해의 작품이다. 1725년 조영복이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관직에 올랐을 때의 모습인데, 흉배가 없는 관복인 시복時服을 입었 으며, 허리에는 삽금대를 두르고 머리에는 오사모를 쓴 채 호랑이 가죽을 깐 의자에 앉아 있다. 17세기말~-18세기초의 공신상과 유사한 형식을 정교하게 표현했으며, 오른쪽 위에 조영복이 54세 때 진재해가 그렸다고 적혀 있다.



초상화는 다른 그림과 비교하여 실제와 똑같게 표현해야 하는 '사실성'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얼굴의 표정은 물론 흉터 점 수염 한 올까지 상세하게 그렸다.

또한 초상화는 걸모습뿐 아니라 주인공의 성격이나 인품 등 정신적인 면까지 담아내야 했다.


오명항吳命恒 초상 Portrait of O Myeong-hang 조선 1728 해주 오씨 오원석 위탁 위탁 355 조선 후기 문신인 오명항(1673-1728)의 55세 때 모습을 담은 초상이다. 1728년 소론과 남인 일부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을 때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은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임명되어 반란을 진압하였고, 그 공으로 양무공신揚武功臣 1등에 봉해졌다. 이 초상은 공신에 오른 것을 기념 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짙은 녹색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는데, 이는 조선 후기 공신상의 전형이다. 가슴의 운학홍배는 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문관을 상징하며, 쇠뿔로 만든 허리띠는 정1품의 품계를 나타 낸다. 다소 깊게 파인 단령의 목선과 높은 관모, 넓은 소매 등을 통해 18세기 전반기의 그림으로 추정한다. 얼굴의 마마(천연두) 자국까지 그대로 그려내 조선 초상화의 사실성을 잘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지만 옛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남기거나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다.

이렇듯 다양한 초상화를 통해 500년 전 경기인의 모습을 만나보자.



김중만金重萬 초상 Portrait of Kim Jung-man 조선 1728년 보물 언양 김씨언성군 종중 기증 소장 12295 조선 후기의 무신인 김중만(1681-1755)이 관복을 입은 모습을 그린 전신상이다. 경기도박물관은 모두 4점의 김중만 초상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보물로 지정된 세 점의 초상 중 하나이다. 김중만은 이인좌의 난을 조정에 알림으로써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양무공신 2등에 올랐다. 공신에 책봉되던 당시 그린 초상화로 보인다. 김중만은 검은 관모와 짙은 초록색 관복을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않았는데, 분명한 음영으로 표현한 이목 구비가 두드러진다. 가슴에는 학 두 마리가 새겨진 홍배를 달았고, 허리에는 금장식의 학정대鶴頂帶를 둘러 종2품의 관직을 나타냈다. 조금 각진 얼굴과 복식의 주름 등은 날카로운 눈매와 어울려 무인의 기운을 드러낸다.



A portrait is a painting of a person.

To Korean ancestors, a portrait didn't just mean a record
or a work of art. From the preparatory stage, they worked with great care.

After completing a portrait, they considered it same as a living person.


조병현趙秉鉉 초상 Portrait of Cho Byeonghyeon 조선 1846년 조장희, 조융희 위탁 위탁 785 조병현(1791-1849)은 자가 경길, 호는 성재이며, 조득영의 장남이다. 1822년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조만영, 조인영 등과 합께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할동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공격받아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사사되 었다. 이 그림은 조병현이 관복을 입은 모습 초상이다. 검은 관모에 녹색 단령을 입었으며, 허리에는 물소 빠로 만든 허리띠를 두르고 가슴에는 쌍학흉배를 분였다. 반복되는 붓질로 명암을 표현하였으며, 화면 오른쪽 위에는 조병현의 56세 모습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글 을 쓴 이는 항천香泉인데, 이는 헌종을 가리킨다. 헌종이 이 초상을 그리게 하고 직접 글을 적었다고 한다.

조득영趙得永 초상 경진본庚辰本 Portrait of Cho Deukyoung 조선 1820년 조장희, 조융희 위탁 위탁 783 조득영(1762-1824)의 유복본 초상화이다. 머리에는 내관과 외관으로 이루어진 동파관을 썼으며, 흰색 도포를 입고 히리에 흰 세조대를 돌렸다. 얼굴의 외곽선과 이목구비는 악간 굵은 갈색 선으로 중요한 윤곽을 그렸고, 그 안쪽으로 흐리고 짧은 필선을 부분적으로 그어가면서 음영과 입체감을 표천했다. 눈가의 주름이 1811년에 그린 초상화보다 늘어났고, 훈 수염도 훨씬 더 많아졌다. 풍성한 수염은 구불거리는 있은 선을 정교하게 사용해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입고 있는 도포의 옷주름 묘사에서 명암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화면 오른석 위에 글을 적어 조득영의 59세 모습을 1820년에 초상화로 제작한 것임을 밝혔다.


조득영 초상 신미본辛未本 Portrait of Cho Deukyoung 조선 1811년 조장희, 조융희 위탁 781 조득영(1762-1824)의 자는 덕여, 호는 일곡이며, 조진명의 장남이자 조병현의 아버지이다. 1789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순조 때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 심인물이었으며, 죽은 뒤에는 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다. 초상은 조득영이 유생 복장을 한 모습이다. 머리에는 탕건을 두르고 검은 사방관四方冠을 썼으며 흰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검은 세조대를 둘렀다. 얼굴의 외곽선과 이목구비는 엹은 갈색의 선 으로 윤곽을 그렸고, 안쪽으로 흐리고 짧은 선을 무수히 그어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했다. 수염은 가늘고 구불거리는 선을 정교하게 사용 하여 풍성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도포의 주름 묘사에는 명암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화면 오른쪽 위에 조득영의 50세 모습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Compared to other genres, a portrait had to be realistic.

In other words, the person in the portrait had to be exactly same as the real person.

Not only the person's facial expressions but also their scars, moles and every hair of their beard were depicted in detail.



조환趙환 초상 Portrait of Cho Hwan 조선 1774년 조장희, 조융희 위탁 위탁 779. 조환(1720-1795)은 자가 군서, 호는 각미이며, 조상기드 장남이자 조진명의 아버지다. 음직을 지내다가 5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등에 올랐다. 1787년에는 동지마다 보내는 사신단에 부사로 참여하여 북경에 다녀왔는데, 그 내용을 적은 연행일록이 전해진다. 초상은 관복의 일종인 시복울 입은 모습이다 검은 관모와 분홍색 단령을 입고 허리에는 삽은대를 착용한다. 얼굴은 굵은 갈색 선으로 그렸으며, 희고 검은 수염은 가는 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했다. 관복 옷주름 묘사에는 부분적으르 명암을 넣어 입체감을 나타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조환 55세 모습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가 높은 수준에 도달한 18세기 후반의 양식율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Moreover, a portrait had to describe not only the person's outer appearance but also their inner side such as their personality and character.

Therefore, portraits give a glimpse into the life of GyeongGi people who lived in the province throughout the 500-year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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