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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고고학이 무엇을 집어낼 것인가? 경주 사라리 고분 발굴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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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굴을 어찌 읽어낼 것인가? 조사단은 물론이고 학계 전부의 몫이며 무엇보다 언론의 몫이다.

 
한국문화재재단이 경주 사라리 소규모 주택 예정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기원전 1세기에 만든 것으로 생각되는 이 지역 유력 권력자 무덤을 찾았다는 8일 발표는 언론계 용어로 이른바 야마를 어찌 잡아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는 데가 말할 것도 없이 조사단이다.

그 조사단이 어떤 방향으로 이번 발굴조사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이후 전개되는 모든 논의가  달라지는 까닭이다.

이 점에서 이번 발표는 어땠는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보도자료를 주목해야 하는 바, 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메인타이틀과 서브타이틀, 그리고 본문 앞대가리다. 

이 보도자료는 제목과 첫 대목이 이렇다. 


기원전 1세기 새로운 청동거울을 발견하다
한국문화재재단, 경주 사라리 124-2번지 일원 유적
국비지원(소규모) 발굴조사 성과 공개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최영창)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사라리 124-2번지 일원에서 널무덤 2기, 덧널무덤 2기를 비롯해 청동기시대 및 삼국시대 생활유구 등을 발굴했다고 8일 밝혔다.

특히, 덧널무덤 1호에서는 청동거울편, 칠초철검과 칠기 등 기원전 1세기 당시 권력자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청동거울은 편(片)으로, 명문은 “…承之可…”만 확인되었다. 해당 지역의 발굴조사는 2023년 12월 6일부터 2024년 2월 27일까지 진행되었다.
 

동경 파편

 
메인타이틀이 가장 중요한데, 이걸 저 보도자료는 기원전 1세기 새로운 청동거울을 발견하다 를 잡았다. 

그러면서 그런 유물을 포함해 그 시대로는 고급 유뮬을 토해낸 문제의 무덤은 기원전 1세기 당시 권력자의 존재를 입증 한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조사단 자체가 벌써 무엇을 핵심으로 잡아야 할지 헤맸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우왕좌왕한 느낌을 준다. 

첫째 기원전 1세기 청동거울을 발견한 사실이 유별난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저 정도 사안은 이제 한국고고학에서 여전히 주목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실만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단계는 지났다.

기원전 1세기에 저 정도 유물, 더구나 저 정도 유물 세트 조합을 갖춘 데는 꽤 많이 나왔다. 

저보다 몇 곱절 위대한 왕묘王墓는 이미 경북 영천 양지리에서 확인된 바 있고, 같은 경주에서도 경주 조양동 유적이 그러하며, 이번과 같은 한국문화재재단이 발굴한 경주 탑동 목관묘에서도 이미 그런 양상은 충분히 드러났다.
 

이른바 일본 청백경

 
따라서 기원전 1세기 청동거울을 출토했다 해서, 나아가 그런 거울을 껴묻거리로 쓴 그 시대 무덤이 나왔다 해서 그 시절 이미 경주에는 저런 무덤을 쓸 만한 권력자가 출현해 있었다는 주장(이것이 곧 발굴단이 강조하고자 한 사안인데)은 이제는 새로울 것이 없다. 

이번 발굴이 의미가 있는 대목은 그런 권력자 무덤에서 굴원이 출현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대서특필할 만한 사건이다.

물론 이런 내용이 보도자료 본문에서는 언급되기는 한다.

이를 조사단에서는 일본 고고학 성과를 빌려다가 청백경淸白鏡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우리가 왜 일본 고고학 분류를 따라야하겠는가?

물론 반드시 비교자료로써 제시는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청백경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일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것은 이런 유물이 먼저 나온 일본에서는 청백경이라고 부른다는 정도로 간단히 소개하고 말면 그 뿐이다. 

이번 발굴이 시종일관 중요한 것은 굴원이다.

굴원이 남긴 불후의 금자탑 초사, 이 작품을 응용한 문구를 새긴 구리 거울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굴원은 그 활동연대가 명확하지 않는 점이 있지마는, 기원전 4~3세기 장강 유역 초나라 정치가요 문인이다.

그의 초사는 워낙 영향력이 강력해 이미 동시대에 그를 추종하는 무리를 낳았으며 이후에도 끊임없이 굴원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후배 문인들이 뒤따랐다. 

저 무덤을 쓴 기원전 1세기까지만 해도, 굴원과 그의 추종자들을 한묶음한 앤솔로지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 굴원을 도안으로 활용한 동경이 다름 아닌 신라가 발흥하는 그 무렵 기원전 1세기 경주 땅에서 나왔다는데 이것이 어찌 대서특필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번 발굴 야마는 굴원이다. 이 굴원을 앞세웠어야 한다. 

단순히 기원전 1세기 경주 지역 무덤에서 동경이 나왔다, 그는 동시대 권력자다 라는 말은 어디에서도 새롭지 않다. 

시종일관 힘주어 강조했어야 하는 대목은 바로 저 굴원이다. 

그런 점에서 저 작은 파편 하나에서 저 엄청난 정보를 읽어낸 발굴단 노력은 가상하기 짝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하등 이론이 있을 수가 없으며, 나는 이 대목은 박수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빛나는 노력과 그 성과는 해석으로 더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내가 조사단에 아쉬운 점은 이것이다.

바로 해석의 문제에서 짙은 아쉬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이번 발굴을 자문했을 이 분야 전업적 학문종사자, 곧 고고학계에도 일정 부분 책임을 지울 길을 열게 되는데,

하긴 뭐 그네들이 굴원을 알겠으며, 초사를 알겠는가?

이해는 한다만, 자문을 구할 데를 구해야지 굴원도 모르고 초사도 모르는 고고학도들한테 무슨 자문이란 말인가?

언론 또한 문제는 없지 않다. 이 언론의 한계로 언제나 지적되는 점이 전문성이라, 이 전문성이 태부족이니 언제나 보도자료 언저리를 맴돌뿐이다. 

보도자료는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나 보도는 그것을 파괴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파괴적 분석이 어찌 하루아침에 이뤄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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