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북한이 평양시 낙랑구역 귀틀무덤 정백동貞柏洞 364호분에서 출토한 논어 죽책竹冊이라,
총 39매인 이 죽간은 현행 논어 편제 구성으로는 권 11 선진先進 편 31매 555자에다가 권12 안연顔淵 편은 8매 147자를 합친 도합 702자가 적힌 것으로 드러났다.
이 논어 죽간이 남한에는 2009년 그런 발굴 사실이 공개됨으로써 아연 관련 학계에서는 화제가 되기도 했으니,
이 무덤에는 낙랑 호구 목간, 좀 장황히 쓰면 '낙랑군 초원4년 현별 호구樂浪郡初元四年縣別戶口 통계문서'라는 목간이 출토되기도 한 곳이다.
이 호구 목간에 의하면 전한前漢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년) 현재 낙랑군 내 인구가 28만명, 호구수는 4만5천여 세대라 했으니,
저를 출토한 저 무덤은 기원전 1세기 중반 무렵에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저와 같은 문자자료가 출토될 때마다 관련 학계, 특히 일본학계와 짬짜미해서 덩달아 한국 학계가 호들갑하며 오도방정하는 꼴을 몹시도 꼴 사납게 보거니와,
그 이면에는 무식주의 원시미개주의가 발동하는 까닭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해 한반도 혹은 일본 열도는 어느 시점까지는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생활이 펼쳐졌다는 팽배한 인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저와 같은 문자자료 출현은 저것이 이른바 낙랑군이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어찌됐건 한반도, 혹은 그 일부에서 이미 늦어도 기원전 1세기 단계에는 확실한 문자층이 성립되어 있었고,
더구나 논어라를 텍스트를 소비하는 계층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해서 호들갑하거니와
왜 저런 무식주의가 발동해야 하는지, 그 무식주의는 실상 그렇게 생각한 놈들 문제 아니겠는가?
지들이 무식하다고 지레짐작하거나 그렇게 매도하고, 그런 문자 암흑기로 스스로 설정해 놓고, 그렇게 설정한 암흑기에 그것을 배신하는 증거가 하나 나올 때마다 오도방정 떠는 꼴이 어찌 꼴 사납지 않겠는가?
기원전 1세기 무렵 만든 창원 다호리 1호 통나무 목관묘에서 붓 한 자루 나오니, 또 한 번 오도방정을 떨었으니,
와 이로 보아 기원전 1세기 단계에 이미 한반도 남부에서는 문자 생활을 했네 하는 그런 무식주의에 대한 배신하는 증거라 해서 오도방정이 더 커질 수밖에 더 있겠는가?
한반도가 기원전후 무렵까지도, 아니 더욱 정확히는 신라 가야 문화를 기준으로 4세기, 혹은 5세기 무렵까지도 제대로 된 문자 생활을 영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신라와 가야 사회를 그리 설정한 직업적 학문종사자들 짓거리에 지나지 않지, 그것이 곧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왜 신라 가야가 이미 건국 단계에서 문자 생활을 했다는 생각을 못한단 말인가?
어떤 놈이 이딴 망발과도 같은 상식을 심었단 말인가?
저 지금의 평양 땅에서는 논어가 소비됐다는 뜻은 논어로 가르치고 그것으로 배우는 학생들, 곧 학원이 있었다는 뜻이다.
논어는 그런 식으로 학습됐고 그런 식으로 소비되었다.
저 논어 죽간이 지닌 폭발성은 바로 이 학교다!
다시 말해 지금의 평양 땅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학교가 있었다!
내 저와 관련한 그 많은 글을 봐도 이 중요한 지적 하나 제대로 한 놈을 못 봤다.
각설하고 저 평양 땅에서 학교가 운영될 그 시점, 그것과 같은 시기에 왜 경주 땅에서 굴원과 초사가 소비되지 말라는 법 있단 말인가?
동경에 장식용으로 쓴 문구이기 때문에 그에 굴원과 초사가 보인다 해서 그것이 바로 그 시점에 경주 땅에서 굴원과 초사가 소비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이 딴 식으로 망발을 펼 줄은 안 봐도 야동이지만,
거꾸로 말해서 그렇다면 왜 하필 굴원과 초사를 도안한 동경이 경상도 땅에서 소비된 이유는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간단하다.
저런 동경이 기원전 1세기 경주 무덤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 시절에 이미 굴원과 초사를 소비하는 층이 그 지역사회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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