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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일찍이 고려시대 후비后妃 책봉제도를 들여다 볼 적에 절감한 것으로, 내 결론은 백관지에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였으니
왜 그런가?
전연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려사 찬자들은 고려시대 관직 제도에 대해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별 못한 데가 천지라, 궁주宮主만 해도, 이것이 이른바 몽골 간섭기를 계기로 그 위상이 급속도로 변함에도 이걸 전연 알아채지 못했으며, 기타 원주院主니 뭐니 하는 등급도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철저히 사례 중심으로 파고 들어 그를 통해 그 작동 원리를 도출할 수밖에 없다.
고려사 백관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란 것도 저 백관지 축약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기는 고려사 찬자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내 결론이었고, 그래서 나는 고려사 백관을 논할 적에 첫째 고려사 백관지를 버리고 둘째 그에 관한 선학들 연구성과란 것도 깡그리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내가 다시 시작한다.
돌이켜 보면 이 고려사도 연구자랍시며 뻘소리 하는 놈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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